피안의 풍경 - 써니킴, 《메아리》
구나연 (미술비평)

한 소녀가 바위 끝에 서 있다. 곧게 서서 발 아래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소녀가 눈앞의 풍경 속으로 내려가기에는 그녀가 선 바위 아래가 벼랑이다. <precipice(2021)>에 등장하는 소녀는 더 이상 내디딜수 없는 풍경 앞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풍경속으로 대신 내려가도록 이끈다. 이제 우리가 숲으로 들어가야 할 차례라고 하는 것처럼. 써니킴의 작업에 오랫동안 등장해 온 소녀들이 모두 그랬듯이 이소녀 역시 교복을 입고 있다. 교복은 특정한 시절 동안만 입을 수 있는, 유한한 시간인 것이다. 그들은 오직 그 시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 대신 그들은 무한한 풍경 안에 고인 시간에 기거한다. 그들은자신의 미래를 모른 채, ‘현재’였던 ‘과거’에 남아 ‘야호’하고 소리친다. 써니킴이 약 20 여년 전 그린<야호 소녀들(Yaho Girls, 2002)>이 힘껏 외친 그 음성이 ‘메아리’가 되어 울리는 무한의 풍경을,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시간의 끝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소녀의 시선을 따라, 사그라지지 않는 메아리의 반향을 따라,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에 대한 기억과 경험하지 않은 추억을 되뇌는 신비한 시간이 공명한다. 이것은 배후에 있는 시간 같은 것이다.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 곱씹어 보는 시간은늘 자신의 뒤에서 째깍거리는 시침 소리와 함께 한다. 이를테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道草』의 주인공 겐조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짙게 깔린 인물로,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둘러싸고 촘촘히 얽혀 있는 배후의 시간에 대해 번민한다. “겐조는 자기 배후에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끝내 잊을 수가없었다. 평소의 그에게 이 세계는 과거의 것이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에는 갑자기 현재로 변해야 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1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두 공간의 관계와 선택에 대해 늘 사유해야 했던 써니킴에게 교복을 입은 소녀들은 겐조가 느낀 배후에 있는 세계와 유사한 메타포가 된다. 그가 그린 소녀는 인칭도, 시제도없이 ‘교복’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 삶의 영원한 배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상기나복기가 아니다. 베케트는 “아무리 성공적이라 해도, 상기하려는 시도는 과거의 감각에 대한 "메아리”이며, 만일 지나간 감각의 인상이 우리의 현재를 자극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허무는 차원의2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자의식을 개방하여 현재 안에서 집요히 파동 하는 과거를 받아들이는 일은 써니킴에게 소녀들의 음성이 메아리치는 풍경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꿈에서 꾸는 꿈처럼 더 흐릿하고, 더 자유로운 그곳은 소녀와 화가가 동시에 바라본 끝이 없는 풍경이다. 그곳은 어떤 공간이자 표면이면서, 기운과 대기가 교차하며 만들어낸 육중한 투명성을 지니고 있다.

써니킴이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풍경들은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가까운 근경을 떠안고 있는 원경만을 도려낸 것이 아니다. 그의 풍경은 모든 먼 것이 먼 채로 가까이 보인다. 먼 곳의 안, 그 숲속에 있는 바위와 나무가 물이 모두 홀연히 자신을 드러내어, 우리는 그것을 작은 채로, 흐린채로, 그러나 가까운 것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화면 안에 지평선을 이루며 미스테리한 구조를 형성한 겹겹의 형상은 회화적 물성의 집적과 교차 가운데 현현한다. 예컨대 <Dust>는 프레스코 벽화와같이 바래진 시각성을 내포하면서도, 반투명하게 색을 머금은 붓질의 흔적이 무수한 레이어를 만들며 형상을 이루어간다. 그리고 불현듯 물감의 궤적이 화면 위로 흘러내리면, 거칠게 지나가는 직관적인 스트로크가 또 다른 형상의 층을 다그친다. 이러한 형식은 화가의 심리와 행위의 변화가 그대로 풍경의 깊이와 농도에 반영될 때 쌓이는 회화의 지층이다.

이번 전시에서 써니킴의 풍경은 화가의 내면에서 미리 상정된 광경의 재현이 아니라, 그가 움직이고 칠한 빛과 색의 변주를 거칠 때에 비로소 번득이는 풍경이다. 그것은 화가와 풍경과의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화면은 곧 시공의 선형적이며 보편적인 흐름이무의미한 피안의 풍경이다. 우리는 그의 풍경 앞에서 수없이 많은 층위로 ‘멀리서 가까이 있는’ 습습한숲과 만나게 된다. 이곳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와 넓이가 곧 내면의 상태와 결합된 시적인 것으로, 바슐라르는 이를 “숲의 체험”이라고 부른다.3 이는 소녀가 존재하는 시간을 품고 있는 공간으로, 앞과 뒤, 옆과 위의 경계가 휘발되며 하나의 숲이자 여러 개의 숲이 유연하게 뒤섞인 역설의 영토이다. 이 영토는 여러 시간의 기운으로 휘돌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움직이며 안개와 같이 붙잡을 수 없는 촉각으로 흩어진다.

써니킴에게 영토는 화면에서 생성되는 회화적 물성의 양태를 그대로 전달하는 리얼리티와도 관련된다.그림이라는 실체는 캔버스 천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결과이며, 이 사건을 일으키는 동력은 바로 화가이다. 그것은 온전한 화가의 장소이자 화가의 구역으로,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하는 자아의 현시인 것이다. 특히 배후의 시간과 눈앞의 시간 사이의 공간은 이중적인 것들에 대한 부단한 콜라주로 간척된다. 써니킴은 캔버스의 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벽에 밀착된 캔버스 천 위에 즐겨 작업한다. 이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그에게 펼치고 말아 이동하기 용이하기에 그러한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단단한 벽 위에 틈 없이 붙여 한 공간의 온전한 일부가 되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의성은 풍경을 이루는 지평선 구도와 그에 반하는 수직의 궤적들이 교차하며 일궈내는자신만의 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켜켜이 이어진 지형과 그 위를 돌연히 훑고 지나가는 불모지가 교행하며 만들어내는 풍경의 플롯은 자신의 삶을 엮어내는 시공의 관계 속에서 부단히 붙잡아낸 내적반향의 표상일지 모른다. 더욱이 그의 작업에 종종 등장하는 폴(pole)은 그러한 반향이 응집된 자의식의 영역 표시와 같다. 사라진 소녀들이 기거하는 풍경은 조용히 메아리치는 배후의 시간이 전도된 공간이면서, 동시에 신기루와 같은 현재의 영토 속에 펼쳐지는 명백한 장소인 것이다. 폴은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현존의 공간과 피안의 풍경을 횡단하는 수직의 가교와 같이 서 있다. 피안의 풍경은 교복입은 소녀들의 목소리가 지닌 음향의 씨앗으로 숲이 되었지만, 이제 그곳은 온전한 현재이자 아득한 영토로 우리 앞에 메아리친다.


1 나쓰메 소세키, 『한눈팔기』,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6, 89.
2 사뮈엘 베케트, 『프루스트』, 워크룸프레스, 2020, 50
3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동문선, 2023, 299.
If Different Day is a Same Day…
Enna Bae

If Different Day is a Same Day… is a cumulative installation of paintings, film, images and objects by Korean-American artist Sunny Kim. The exhibition was conceived through our long-distance conversations -- she was in New York, going through a difficult lockdown, while I was in Seoul. We have collaborated on two reenactment performances, Still Life (2012) and Landscape (2014). If Different Day is a Same Day …  became a rumination upon ways to make a seemingly-impossible exhibition real, leading us into an unpredictable journey of temporality. In a time when the artist felt continuing her work an unfeasible task, I wanted to convey a space that felt as if we were traversing the time she spent on her painting instead of displaying her paintings through an exhibition. If Different Day is a Same Day … exposes these points of inconsistency where we contend with a present that unveils a world made unfamiliar.  

Revisiting the artist’s memory and in dialogue with both the distant and immediate past, If Different Day is a Same Day… opens a sense of impermanence in Kim’s painting. Faced with a world made unfamiliar and isolating, Kim, rather than anticipating what follows, instead chooses to reflect upon past emotions and hopes. The girls in uniform from Playing Stones (2020) who once reenacted her paintings, the dismantled plywood from the structure of Landscape (2017) opening up the gallery space, the mountain separating the sky and the land in Point of View (2015), the distant Big Flower Tree (2019) and closely seen Small Flower Tree (2020) - these images invite us to a world where nothing is new, yet nothing is old.

‘Memory’ seems a tenable material rooted in reality when one is in isolation. Kim begins If Different Day is a Same Day… with a fixed point in time and uses it to invoke other instances of her recollection, accompanied by her archive of images, writings, and other found materials. The exhibition is also supported by Kim’s own reading of A Sixfoot Sickbed by Masaoka Shiki (1867 - 1902), with which the artist has assimilated the feelings of confinement, isolation, consolement and hope with her own situation under lockdown.  

Sunny Kim imbues a sense of grief and hope, reanimating and altering moments that appear permanent in an attempt at eroding them. It is a wall that appears and interrupts the depths of her paintings; the reflection of a mirror that can’t be met with the real, and like the ‘dead center’ that continuously emerges, the image’s substance that can’t be caught with the ‘seeing’ of the eyes, the ‘awakening’ of the body that we must contend with, and the ‘vitality’ of our mind. If Different Day is a Same Day… is an exhibition where Kim reenacts the ‘liveness’ of things past throughout the ‘tableau-space’ by rearranging her paintings and images in different gestures: juxtaposing, adjoining, overlapping, laying down, overlaying a voice that echoes in the room. Kim’s attempt to grasp perpetually ceasing moments become real in space, but ultimately this reality is an image that can’t be grasped.
다른날이 같은 날이었으면…
배은아

오히려 프로젝트에 가까울듯한 써니킴의 개인전 <다른날이 같은날이었으면...>은 팬데믹으로 인해 미국에 고립되어야 했던 써니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갈 수 있었던 우리 둘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2012년과 2014년 <정물>과 <풍경>으로 협업했던 써니킴과 나는 한국과 미국이라는 좁힐 수 없는 거리와 만날 수 없는 시차 앞에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전시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전시할까가 아닌 불가능할 것만 같은 전시를 가능하게 하려는 바램으로 시작된 이번 전시는 우리를 예상치 못한 시간의 여정으로 이끌었다. 작가에게 더 이상 그림 그리기가 불가능했던 시기에 나는 써니킴의 그림을 보여주기 대신에 마치 써니킴의 그림 그리는 시간 속을 거닐듯이 그 회화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기획된 <다른날이 같은날이었으면…(2020)>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뒤바뀐 세계 혹은 전혀 다른 세계의 결들을 펼침과 동시에 마주해야 하는 불일치의 순간들에 이끌릴 수 밖에 없었다.

팬데믹으로 인한 격리와 고립의 시간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게 했고 그 순간 이미 과거는 어제의 과거가 아닌 오늘의 과거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억의 방문을 통한 시간의 이동이 이번 전시를 위한 유일한 -현실적인- 재료가 되었다. 그림 속 소녀들을 재연했던 진짜 소녀들의 <돌 던지기 (2020)>, 합판을 모방한 캔버스와 나란히 벽을 함께 하는 해체된 <풍경 (2017)>의 합판, 산을 가운데 두고 뒤집힌 <시선 (2015)>의 하늘과 땅, 멀리 보이는 <큰 꽃나무 (2019)>와 가까이 보이는 <작은 꽃나무 (2020)>,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워털루 전쟁터 액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뒤바뀐 세계.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가 교차하는 전혀 다른 세계,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그럼에도 일치할 수 없는 모순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경험했던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 지금이 아닌가.

태초의 장소에 정령이 있다. 정령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불러오고 신체없음으로 사라진다. 빛이 빠져 나온 어둠의 자리에서 시작된 심연의 고독은 멀어짐으로 다가오고 죽은 기둥을 뚫고 나오는 줄기의 생명은 뽀얗게 흩어져 나와 만난다. 여기에서. 빛을 통한 어둠의 벌어짐이 어둠에서 물러서는 빛과 결합되어 찾아가는 이중의 거리. 모순의 공간. 써니킴의 풍경은 정면의 얇음과 측면의 두꺼움 사이에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보기를 멈추게 한다. 그리고 한발자국 뒤로 움츠리게 한다. 이미지는 그렇게 보기의 환영을 깨고 신체의 충격으로 실재성을 획득한다. 어둠의 절대적인 깊이와 빛의 동요가 마주하는 그 장소에 태초의 경이로움이 자라난다.

써니킴의 회화는 결코 바뀔 수 없는 어떤 순간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삶에서 각인된 한 순간은 우연히 발견된 사물이나 엽서 혹은 문학 속 한 페이지와 연결되어 때로는 절망으로 때로는 희망으로 그 안타까움의 끈을 놓지 못한다. 그의 회화에서 울리는 ‘돌아오라’, ‘살아나라’, ‘머물러라’와 같은 간절한 바램은 정지된 이미지를 일어서게 하고 죽은 자를 되살리며 지나간 시간을 다시 불러 온다. 지난 봄 써니킴은 모든 것이 정지될 것만 같은 어둠을 통과하면서 ‘살아있음’에 대한 간절한 바램으로 지나간 시간을 다듬기 시작했으리라. 그리고 그 주변을 채우고 있었던 먼 시간을 가까운 시간으로 불러오고 가까운 시간을 먼 시간으로 보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번 전시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운드 설치는 일본 시인 마사오카 시키(正岡 子規, 1867-1902)가 병상에서 써 내려간 <병상육척(病床六尺), 1902>과 동료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와 주고 받은 서신을 낭송하는 작가 자신의 목소리이다. 이는 써니킴이 뉴욕의 밤에서 서울의 낮으로 보내오던 나를 위로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다시 읽음’을 통해 위로 받은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어눌한 피아노 연습 소리는 작가의 목소리와 함께 더 안타깝게 소녀들의 시간 속으로 이동한다. 다가올 시간이 더 이상 미래가 될 수 없듯이 지나간 시간 또한 과거로부터 단절되어 지금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는 듯. 그렇게 써니킴의 현재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끝나간다. 이는 그녀의 회화에 등장하는 깊이를 방해하는 벽, 실재와 만나지 못하는 거울의 반향, 그리고 계속해서 뚫고 나오는 ‘Dead Center’와 마찬가지로 눈의 보기가 결코 잡을 수 없는 이미지의 실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 하는 몸의 깨어남 그리고 마음의 살아있음이리라. 그럼에도 내게는 여전히 이상한 써니킴의 그림 그리는 시간 속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써니킴이 그림 그리는 방식으로 써니킴의 회화와 이미지를 공간 속에 병치하고 중복하며, 인접과 겹침 그리고 단절된 ‘그림-공간’을 구현해본다.
잘 돌아왔어.

소설의 한 문장이 내 마음을 흔든다.

이 문장은 행동의 묘사보다 감정 자체로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필시 내가 그 문장 속으로 들어가, 그 문장이 일으키는 바람을 느끼고, 그 소리를 들으며, 그곳에서 깊이 반응하는 나의 감정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은 어딘가 낯익은 곳이며 익숙한 느낌의 공간이다.

잘 돌아왔어.
나에게 이 문장은 대화일까.
누군가 나에게 하는 말소리.
내가 나에게 하는 말소리.
아니면 어디선가 들리는 말소리.
아니 어쩌면 나의 생각 속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은, 언젠가 이곳을 떠났었다는 말이 된다.

떠나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나 사정이 있고, 원해서도, 원하지 않아서도 가능한 일이다. 나에게 떠난다는 것은 ‘영원’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끝없이 슬픈 이별이다. 그 이유로, 나는 현재를 느낄수 없고, 과거를 반복해서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이 문장이 나에게 전해주는 느낌은 아마도 내가 오랫만에 느껴보는 ‘소속감’이 아니었을까.  

내가 유령처럼 붙들고 있는 것은 나의 삶에서 불현듯 사라진 것들, 그로 인해 존재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이 시간은 과거이기도, 그래서 현재이기도, 내 것이기도, 타인의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들은 우리가 규정짓는 시간에서 떨어져 나가 스스로 만들어낸 공간에서 유동적으로 흐르기를 거부하며 본인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작업은 허구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보이지 않는것을 보이게 하는 역할로서 존재한다. 알수 없는 영역에서, 끝없이 나의 존재성을 질문하는 그곳에, 그림이 있다.

오랫동안 쓰던 컴퓨터가 갑자기 멈췄다.
컴퓨터가 눈이 멀었다.
암흑같은 블랙스크린 속에서 퍼지는 비프음만이 나의 심장소리처럼 뚜욱 뚜욱 뚜욱.
세번.
나는 계속 불안해 했다.

우여곡절 끝에 화면에 빛이 스며들고 점차 확실해지는 바탕화면의 ‘캔디’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잘 돌아왔어.

Sunny Kim
Seoul Art Guide, July 2018  p.66
올해의 작가상 2017
Sunny Kim Interview


《올해의 작가상 2017》의 시작으로, 써니킴 작가의 전시 공간 《어둠에 뛰어들기》를 만나게 된다. 어둡게 칠해진 벽,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않은 작가의 전시장은 그 뚜렷한 형상을 드러내지 않고 전시장에 들어선 우리를 낯선 풍경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모호한 회화의 장면들. 3차원의 구조물 위를 덧씌우는 오브제와 영상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맺어가는 풍경이다. 길처럼 구획된 전시장을 돌아돌아 발걸음을 옮기며 마주하게 되는 풍경은 마치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듯, 상실된 기억 혹은 불완전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틈을 열어 놓는다. 형언하기 어려운 먹먹한 풍경 속의 단서를 찾아 이를 풀어 놓는 써니킴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정답을 찾고자 떠난 여정이 아니었으니, 길을 잃고 헤매어도 좋다.

전시 제목이 《어둠에 뛰어들기》입니다. 작가노트를 통해 ‘뛰어들기’라는 행위가 맹목적이기도 하지만 절대적이기도 하다고 언급하신 바 있는데, 이번 전시와 뛰어드는 행위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요?
전시의 제목은 ‘Leap in the Dark’라는 어구(語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둠에 뛰어들기’라는 제목은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로 뛰어드는 것 같은 행위 혹은 이를 추동하는 감정과 관련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작업을 이어오면서 이론적으로 틀을 잡아간다는 생각보다는 작업이 저를 근본적인 어떤 곳으로 가도록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거든요. 답을 알 수 없지만 뛰어드는 행위가 그림을 대하는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제 태도와 맞닿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느꼈던 저의 태도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전시장의 분위기가 전시 제목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어둡게 칠해진 벽면뿐 아니라 가벽으로 좁은 폭의 공간이 나뉘고 이를 돌아가며 관람해야 하는 전시장은 한눈에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없게 하여 관객까지도 어둠에 뛰어드는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전시의 구성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전시장을 구성하면서, 어떤 긴 거리의 걷기를 상상했습니다. 구불거리는 길의 구조를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가벽의 설치는 또한 전시장을 세 개의 공간으로 구분 짓기도 합니다. 첫 번째 공간은 흔히 풍경화라 불리는 회화로 구성했습니다. 길을 잃었을 때 마주하게 되는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생경한 그런 풍경들이죠. 그 방을 지나 두 번째 방으로 가면, 풍경 속에서 소녀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암시하는 작품들이 있고, 설치 구조물인 〈풍경〉을 만난 후, 마지막 공간에서는 소녀들의 초상이 등장하게 됩니다. 전시의 시작으로는 〈자줏빛 하늘 아래〉를 배치했어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인데, 이 소녀가 전시로 우리를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자줏빛 하늘 아래〉는 이번 전시를 구상하면서 처음 그린 작품이기도 해서 저에게도 안내자가 되어주었습니다.

미술관의 창을 열어 자연채광을 사용하신 점이 독특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광은 의도에 따라 통제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할 텐데, 이를 활용하고자 생각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이 공간을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연광 때문이었습니다. 작품에 따라서 누군가는 피하고 싶은 공간일 수도 있을 텐데요, 전시장의 창을 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저를 굉장히 들뜨게 했습니다. 빛의 조건에 의해 그림의 색이 다르게 느껴지게 되고, 계속 변화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저에게는 흥미로웠습니다. 그림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에 대한 생각을 더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했습니다.

전시장 첫 번째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어떤 시간인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무나 물, 바위와 같은 구체적인 자연물이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이고 내면적인 공간으로 느껴집니다.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풍경을 회화에 얹는 것이 아니라 제가 회화를 통해 풍경을 파고 들어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뒷산에만 가도 볼 수 있는 누구나 아는 풍경에서 시작하지만, 그 풍경은 작품 시작의 아이디어로만 남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나무나 폭포, 바위같은 풍경의 요소들로 시작해서 그 안으로 침잠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거기에서 이상한 길이 등장하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합니다. 많은 존재들이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는 반복행위를 통해 전체적인 회화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기둥이나 끈들로 화면이 가로막히기도 하는데요, 이런 풍경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가요?
저의 회화에 등장하는 수평적인 선이나 면들이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둥이나 벽면, 혹은 끈같은 구조들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디바이더(divider)  역할일 수도 있고, 프레이밍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시야를 가로막는 방해물이기에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꾸 물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하죠. 그리고 제가 그린 이 풍경들은 그렇게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아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보는 사람과 거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에서 교복을 입은 소녀가 등장합니다. 작가님의 소녀들은 청소년기에 이뤄진 갑작스러운 미국으로의 이민과 이로 인해 어긋나게 된 인생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곤 했습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녀 이미지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제 작업에는 교복을 입은 소녀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합니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물으면 제가 한국에 대해서 기억하는 이미지라고 설명을 하곤 했어요. 그게 가장 간단한 답이었죠.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 소녀들의 이미지는 제가 겪은 것이 아닌, 그때 주위에서 보였던 모습들입니다. 제가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이루어졌을 모습이겠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상실된 그 이미지가 제 안에 박제되어 남은 것 같습니다. 교복에 대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존재할 수 없었던 저의 미래와 관련된 이미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제 안에 각인되었던 소녀의 이미지로 꾸준히 여러 실험을 했습니다. 자수에 병치해보기도 하고, 영상이나 사진으로 찍어보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이미지를 추출해보기도 했어요. 그 과정들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에 소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소녀들이 떠난 자리가 풍경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일 수가 없는 것이죠. 소녀들과 그들이 사는 세계가 우리 앞에 환영처럼 존재하기 시작했고, 그 풍경 스스로 어떤 리얼리티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교복 입은 소녀들〉에서 볼 수 있는 다섯 명의 소녀들은 모두 자신의 개성이 느껴집니다. 강인해 보이고, 어떤 기대나 희망을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번 전시에서의 의미가 궁금해집니다.
교복이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느껴지는 의미의 층위가 다양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어느 시대의 교복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교복에 담긴 제도적 측면의 의미를 읽어내기도 하고요. 저로서는 교복 입은 소녀의 이미지가 하나의 틀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이 느끼게 되는 상실감이나 무력함에 관한 것이지만, 이것 역시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파생된 것들이기 때문에 조금 더 복잡한 관계로 얽혀있는것 같아요. 저에게 이 소녀들은 일단 제 안에 살아있는 소녀들이고, 때로는 저에게 ‘성인(saint)’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소녀들이 상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를 바랐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서양의 종교화에서 볼 수 있는 성인들의 모습처럼 이 미미한 존재들에게 어떤 확실한 자리를 부여해주고 싶었어요.

전시장 중앙에는 2014년에 진행하셨던 〈풍경〉 퍼포먼스가 영상으로 상영되는 구조물이 설치되었습니다. 실제 공간에서 벌어졌던 공연은 프로젝터를 통해 평면적으로 드러나고, 퍼포먼스의 무대와 같은 공간이 3차원의 구조물로 뒤바뀌는 지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차원을 뒤바꾸는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제가 회화 작업을 아주 오랫동안 이어와서인지, 다른 매체로 작업할 때에도 회화의 구조나 언어가 그 위에 덧씌워지는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2012년의 《정물》, 2014년의 《풍경》 퍼포먼스를 하면서도, 회화의 평면에서 구현되는 수많은 레이어를 3차원의 공간에 풀어놓는 작업을 했어요. 구조물  〈풍경〉 역시 그림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 그려진 오브제가 되어 그림의 방 같은 설치 공간에 들어오고, 퍼포먼스 영상이 다시 그림 위에 투영되는 반복적인 상황을 통해 회화가 가지고 있는 많은 요소들을 생각해 보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그림의 방은 마치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수태고지〉에서 묘사된 공간의 모습처럼 평면성을 강조하면서도 분명히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석고붕대로 형태를 다듬고 그 위에 채색하여 만든 나무나 돌들도 결국 제가 회화의 표면을 만든 것 같기도 합니다. 아는 작가가 제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제가 만든 나무를 보면서 조각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모양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 말해서 함께 웃었는데요, 맞는 얘기인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어눌하고 둔탁하게 제 스타일로 만들어지는 것들을 그냥 내버려 뒀던 것 같습니다.

구조물에서 볼 수 있는 영상은 스크린에 투사하는 것만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풍경에서 느껴지는 어떤 모호함까지도 연결될 수 있는 질문인데요, 작가님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작업을 구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어떤 명확한 답을 향해가는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게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회화가 가지고 있는 추상적인 영역이 그런 느낌을 더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저는 알수 없는 영역이 주는 자유로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회화의 힘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들은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힘들기도 하고 불안하거나 불투명한 감정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자신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잖아요. 답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더 생각하게 만드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의 작업 방향이 궁금합니다.
구체적인 것 중 하나는 〈정물〉과 〈풍경〉 작업 이후에 이어질 〈초상〉 작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상화를 그리면서 초상이 무엇인지, 누구의 얼굴인지 계속 고민하게 되었는데요, 이제 본격적으로 생각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2014년의 〈풍경〉 영상이 구조물 위에 투사되었을 때 비로소 〈풍경〉이 끝났다는 생각을 했는데, 〈초상〉 역시 많은 복합적인 생각 속에서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작가소개
써니킴(b.1969) 작가는 뉴욕 쿠퍼 유니온 대학 회화과, 뉴욕 헌터 대학원에서 종합매체 석사를 취득하였다. 2001년 《교복 입은 소녀들》(갤러리 사간)을 시작으로 《완전한 풍경》(2006, 일민미술관), 《제2의 생각》(2013, 스페이스 비엠) 등의 개인전과 《정물》(2012, 문화역서울 284), 《풍경》(2014, 인천아트플랫폼)의 퍼포먼스를 진행한 바 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인터뷰 옥다애 기자
미술세계, November 2017 pp. 84-87
올해의 작가상 Korea Artist Prize 2017
Sunny Kim


이번 전시는 자연의 빛에 관한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전시실 위 창을 열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들뜨게 했다. 아침. 정오. 오후. 밤. 맑은날과 흐린날.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빛과 함께 스스로 생성하는 풍경을 상상했다. 이 시간성이 나의 풍경으로 들어와 그 곳에 어떤 생명력을 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교복입은 소녀들’이 사라지면서 주체가 되어버린 ‘풍경’은, 아름답기도, 그리고 무섭기도 하며, 눈앞에 있는 듯하나 계속해서 뒷걸음치듯 닿을 수 없는 시공간에 존재한 채 낯선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었다. 마치 길을 잃었을 때 마주치는 풍경처럼, 알고 있지만 순간 생경함으로 다가오는 자연의 요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나는 상상을 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Leap in the Dark / 어둠에 뛰어들기” 이다. 이 제목은 이번 작업을 진행하면서 느꼈던 나의 태도에 관한 생각에서 만들어졌다. 결과를 알수 없는 상태에서 행하는 ‘뛰어들기’는 맹목적이기도 하지만 절대적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느낌처럼 불안하거나 두려운 감정들이 강하게 나를 짖누르기도 했지만, 오로지 그 안에서만 느낄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유년기의 기억은 현실화될 수 없었고, 개인이 통제할 수 없었던 시대의 삶 속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기억 속 잔상으로 남아있는 나의 미래의 모습이었다. 내가 겪을 수 없었던 것. 나의 미래일 것이라 확신했던 시간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교복입은 소녀들’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나의 기억, 혹은 만들어진 기억들은 이런 복잡한 감정들의 연결고리를 찾고 그 속에서 내가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불완전함을 완벽한 이미지로 만들려는 의지와 함께, 그것은 미미하고 나약한 존재들에 부여해주고 싶은 정당성. 존재성. 그런것들이 아닐까. 결국 소녀들은 그림속에서 상실감을 무디게 해주는 ‘완벽한 이미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2012년과 2014년에 큐레이터 배은아와 함께 만든 퍼포먼스 “정물”과 “풍경”은 내가 그림을 통해 계속해서 질문하고 있던 이미지의 ‘reality’ 혹은 ‘realness’ 에 대한 고민을 다른 매체로 풀어보는 시간들이었고, 그림이 가지고 있는 평면성이 삼차원의 공간에서 세분화되어 수많은 겹이 형성되는 순간들이었다.

길의 구조를 띈 세개의 공간에 풍경, 그곳을 배회하는 교복입은 소녀들, 구조물 <풍경>, 그리고 소녀들의 초상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구조물 <풍경>은 퍼포먼스에서부터 고민해 오던 것들이 한곳에 모여 새로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겪었다. 영상이 그림위에 투사되고 그림속의 소녀들이 빛이 되어 또다시 그림속에서 움직인다. 이 작업은 마음속 공간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모든 것이 본연의 모습을 질문하며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함께 공존하는 그림속 공간을, 실제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보고 싶은 나의 욕구에서 출발했다. 그동안 내가 작업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심리적인 영역을 다시 한번 실제공간으로 불러내어, 그림과 영상과 오브제가 공존하는 방을 만드는 것이었다. 상실감과 불안한 감정이 투영된 이 방은 하나의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이 이미지는 불투명한 삶 속에서도 결코 정지될 수 없는,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는, 우리가 붙잡고 있어야 하고 기억해야만 하는 끈 같은 것이다.  

월간미술, October 2017 pp. 116-119
Painting as an Active-Passive Collaboration:
An Aesthetic Discourse on Sunny Kim’s Paintings, Practices, and Ways

KANG Sumi (Art Critic, Professor at Dongduk Women’s University)

1. Pleasure
People’s attitude towards art tends to be more conservative than progressive. This is especially true when it comes to painting, with its long history and ingrained values. For the majority of people, any painting by Leonardo da Vinci is automatically a masterpiece, by default. On the other hand, most experimental paintings by contemporary artists are presumed to be immature and incomplete. Likewise, with regards to artistic theories and concepts, people tend to latch onto widely circulated ideas and narratives, eschewing more eccentric interpretations. Thus, every artist who has gained an exalted place in art history is labeled a “genius.” Then, as implied by the definition of the word “genius,” we embrace the myth that the great artists (almost all of whom are white, European, males) created their masterpieces through some combination of superior talent and the divine intervention of the muse. No matter how much time passes, or human reason advances, or culture flourishes, people still want to believe in these myths. It reminds one of Picasso’s comment that he focused on “finding” rather than “research relating to modern painting,” which was long remembered1, and we love to believe that Van Gogh had to suffer in order to create his incredible works. We love to suggest that the liberating energy of Basquiat’s graffiti is the result of his unique artistic spirit as a minority artist who was inspired by the street. But in perpetuating these myths, we never stop to consider that such concepts—genius, talent, the muse, and the secret creation of divine inspiration—are merely aesthetic claims from a certain perspective, primarily compiled under the influence of nineteenth-century German Romanticism.

Many people would be surprised to learn of a more radical theory about the muse, first put forth by Aristotle in Politics and reintroduced by Pascal Quignard in La Haine de la Musique (The Hatred of Music), his argument for an aesthetic critique of music. According to Quignard, Aristotle suggested that, while singing or playing an instrument, the mouth and hands of the muse “are occupied exactly like those of a prostitute who, with her lips and fingers, inflates her client’s physis in order to make it stand below his belly until he ejaculates.”2 Thus, Quignard suggests that the creation of an artwork is not necessarily the free and independent act of an artist, but is rather bound to something, somewhere. According to Quignard, this binding is the state of “being captivated by sorrow.” Moreover, as memories are accumulated, this captivation by sorrow sinks and collects at the bottom of the artist’s soul—and in the artist’s works—like dregs at the bottom of a vat of wine. But while Aristotle’s sensual analogy may shatter some of the illusions that people harbor about the mythical status of the artist, most will find Quignard’s theory somewhat stifling. After all, of all the words or images that he could have chosen, Quignard asserted that artistic creation and the aesthetic pleasure of a viewer were simply “dregs” ensnared by sadness.

2. Sketch
Now turning to Sunny Kim’s artwork, one may consider my critical analysis to have already begun since my focus – and if possible, to delve into at depth – is Kim’s concentration on “painting” practices, one of the oldest art forms. When making a painting, Kim engages in a series of blind steps, never knowing if the end result will be successful. But this process does not reflect her adherence to a grand methodology or her dependence on inspiration from the muse. To some degree, of course, this description may be applied to any contemporary artist. As such, it may be discussed as an issue that is universal to contemporary art, but it is particularly crucial for an effective analysis of Kim’s work. Since 2012, Sunny Kim has intensively and methodically focused on creating paintings at her own pace, which has allowed her to find her own path and results. Through this process, Kim has been able to create paintings that resonate with an individuality that cannot be absorbed by the universal.

Here exist the purpose and intent of this essay. In order to fully explore this process, this article focuses on Kim’s work from the past five years (I will discuss later why I separate this time period). Moreover, rather than simply discussing Kim’s “paintings” per se, I wish to discuss her overall work, which has been focused primarily—but not exclusively—on painting. In this way, we can better understand her creative trajectory and methodology, as well as what she hopes to achieve through the work of painting, as an artist operating outside the frame of conventional ideologies of art. Rather than manifesting the transcendental “genius” of the artist, Kim’s works express her experiential and performative questions and doubts as a working subject. Rather than being inspired or produced by a divine muse dwelling in her head or her fingertips, her works are the tangible result of a laborious process. Rather than embodying the perfect freedom of creation, her works represent the constraints of invisible forces, as well as the artist’s incessant attempts to strain against or comply with those constraints.

3. Obvious Matters and Opposites
Back to 2001, Sunny Kim (who was then in her early thirties) introduced herself to the Korean art field with her first solo exhibition, Girls in Uniform at Gallery Sagan in Seoul. As suggested by the title, the paintings of this exhibition depicted girls in school uniforms. The paintings seem to capture images from a bygone era, reminiscent of faded photos developed from damaged film. While the overall contours of the figures are visible, the details, like their nose or fingers, are hazy. The surrounding landscape, if it exists at all, is fragmented into areas of light and shade. Indeed, the sharp contrast between light and darkness dominates these canvases. But rather than a cold, dry sensation, these works exude a strange mixture of emotions: longing, nostalgia, comfort, and regret. At first glance, the subjects seem to be Korean school girls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but the styles and subtle details of the uniforms indicate that they are more recent, perhaps from the 1970s or 80s, when Korea was developing at breakneck speed. But the paintings do not seem to portray Sunny Kim’s memories of her own past, nor do they match the time or space around the turn of the millennium, when Korea became affluent, despite the financial crisis of the late 1990s. Herein lies the core of Kim’s early works (if we were to distinguish between her early and recent works for the sake of formality), which clearly depict images from the past, but not images from “her” past. What do these images represent, and why did she paint them?

In 1983, when Sunny Kim was in the eighth grade, her family left Korea and moved to the United States. Thus, she became part of the “1.5 generation” of immigrants, who come to a new country around the time of their early adolescence. She grew up in the U.S., where she studied painting at the Cooper Union in New York City and earned her master’s degree in Combined Media from Hunter College. After initially preparing to launch her career as a young artist in the U.S., she decided for personal reasons to return to Korea in 1998 and started her domestic career as an artist through her first solo exhibition. Thus, for about fifteen years, Korea existed only as a blank space for Sunny Kim, devoid of memories or experiences. Interestingly, after having moved from and back to her homeland for reasons beyond her will, the first works that she showed in Korea were about blankness, absence, and existence – or what is believed to have existed – within emptiness. In sentence form, these paintings would use past progressive tense and the subjunctive mood: “While I was gone, these girls would have been taking this or that photo…” The(se) girl(s) with bobbed hair attended all-girls middle and high schools in the 1980s; they went on field trips to Gyeongju; they assumed chaste poses for a group photo beneath the eaves of a Korean traditional house; they wore fitted uniforms with a white top, broad collar, and black skirt; they stood facing straight forward, with a modest but buoyant smile. As the title states, they are “girl(s) in uniform.” These images are not derived from Sunny Kim’s memories, but nor are they something that she has forgotten. In The Art of Forgetting, neurobiologist Ivan Izquierdo quotes and affirms two key ideas from other scholars: that forgetting is the most striking aspect of remembering, and that what we remember is who we are.3 In this context, the paintings of Sunny Kim cannot be understood solely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remembrance and oblivion, as her works evince certain layers or dimensions where neither her memories nor her subjectivity exist. Perhaps these dimensions are occupied by the collective social memory of Korea, including what has been forgotten. But no matter how she tried, Sunny Kim could not occupy or coexist with these dimensions. Notably, the Korean title of this series includes the word “교복” (“Gyobok” which means “school uniform”), as opposed to the more general term “uniform,” another disjunction that reflects the impassable distance between Sunny Kim or the girls in her paintings. But the gap between them is even larger than this.

The paintings of Girls in Uniform do not document the past or record specific or detailed figures. In fact,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if they are traces of actual existence. But by representing banal and stylized old photos as vague or incomplete figures, Kim touches upon something that transcends individual existence: the loss of an entire era. By conjuring this parallax view, precipitated within social memories, the paintings ultimately evoke the fickle nature of human existence. The abstract and psychological qualities of the paintings make them difficult to visualize or rationalize. But as images that are familiar from our current stereotypes, they address residual matters and conditions of the present, while also drawing our attention to fleeting emotions and unconscious perceptions that we usually choose to ignore. Although the images themselves are distinct and apparent, they also arouse complex, invisible, and multi-layered effects. In this early phase of her career, Kim may not even have been aware of such effects, but that does not mean that they were not an influence or inspiration. At that time, she was primarily interested in exploring how to paint something beyond memory or experience, or how to use the medium of painting to visualize the ever-changing reality through the parallax view. These issues are part of the mission of many contemporary artists who choose to express themselves through painting, the oldest and most conservative artistic field. But at a superficial level, the paintings of Girls in Uniform might still be read as the artist’s attempt to re-visualize photos of the past, in order to stir nostalgia and melancholy.

In my view, this was before Sunny Kim became aware of this mission. At that time, she seems to have been dedicated to amassing such paintings, steadily producing diverse images of girls in school uniform, with different backgrounds and motifs. But in 2012, she began tapping into the core of the medium of painting, boldly discarding two-dimensionality and pursuing various routes. Interestingly, it was only by abandoning the fundamental condition of two-dimensionality and adopting a methodology of diverse expressions, media, and interpretations that she was able to approach the essence of painting. This process is reminiscent of her back-and-forth relationship with Korea.

4. Acknowledgment of Being
The photography resources that Kim used in Girls in Uniform were not social or historical documents, but rather found images, not taken from the artist’s personal or family album. The photos are not indexed or attributed, so the people in the photographs cannot be identified. As such, they are anonymous, and their meanings and functions are opaque. Nonetheless, to Sunny Kim, they weakly but persistently attest to her own presence – I/we, here and now – in a specific time and space that she did not actually experience. Meanwhile, to the viewers, they attest to the presence of the girl(s), there and then. Although Kim altered the figures and changed the meanings of the original images, the figures still exist as beings that cannot be deferred or replaced. One of the first painters who experimented with capturing the essence of photography, rather than simply using photos as tools for sketches or paintings, was Gerhard Richter. According to Richter, “[A photograph] is absolute, and therefore autonomous and unconditional.”4 Similar to Richter, Sunny Kim uses photography as a raw material. Yet due to the absolute, autonomous, and unconditional attributes of the medium, the photography of the schoolgirls must have limited Kim’s freedom of expression. Or, recalling the theory of Pascal Quignard, the existence of the schoolgirl(s) is what captured Sunny Kim with sadness. Of course, Kim “actively” painted Girls in Uniform through her own creative intentions and desires for free expressions. But at the same time, she was “passively” drawn to the leitmotif of “girls in uniform” via photographs of a time and space infused with sadness, or some emotion beyond the sentimental. The sadness is inevitable, because the time and space had vanished from Kim’s own existence, leaving a gap in her experience and memory. The resulting works are an attempt to represent that gap.

Sunny Kim’s paintings are the result of this collaboration between passiveness and activeness. In her creative process, she actively pursues her own artistic expression and aesthetic judgment, but she does so from a restrained or passive position. She cannot look away from the indelible presence of the girls at the ontological level, the presence that is both “being here and now” and “having been there and then.” Like Gerhard Richter, Kim attempts to utilize the objective and material quality of photography as the controlling agent of her subjectivity and thought, and also to revitalize the accidental and active depiction of a subject who escapes from this passive position. In short, she creates her paintings via the feedback between activeness and passiveness. They are an acknowledgment of being, of the people who surely existed but are now blank or absent in one’s memory. They embody the times, lives, experiences, memories, images, controlling powers, the energy of expression, and the desire to act. Of course, they also embody Sunny Kim, the subject that all of these elements and influences converged upon, moved through, and released from.

5. Leap in the Dark
We are living in the era of artificial intelligence, when AI-interfaces like Siri read our minds, answer our questions, and choose our music. The self-learning and constantly improving AI program AlphaGo can now defeat the world’s best go players utilizing adept strategies that people cannot comprehend. In the future, our present era may be defined by our capacity to develop and improve AI technology. What is most astonishing is that we have created this advanced technology, which may ultimately supersede the human species, despite having only a rudimentary understanding of our own minds. For the most part, the territory of the human brain is dark and unexplored. We do not even know how the different areas of the brain function or interact. Indeed, new procedures such as fMRI (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 or PET (positron emission tomography) scans show that even our simplest thoughts involve simultaneous activity among various parts of the brain.

Some readers might be surprised by my sudden segue into the world of neuroscience, but these ideas have great relevance for our understanding of Sunny Kim’s recent creative output. Like today’s neuroscientists, Kim has taken a “leap in the dark,” a term that serves as both the theme and title of her recent exhibition. Taking such a leap means acting without being certain of the result, a spirit that defines Kim’s current painting process. For the last five years or so, Kim has consciously discarded the painting methods that she studied and mastered, and she also avoids making any concrete plans or calculations before embarking on a project. Instead, she seeks to immerse herself in whatever phenomena, incidents, conditions, thoughts, and perceptions that she may encounter while she completes a painting, or better yet, while a painting becomes complete on its own. She leaps into the darkness, courting hardship by exposing herself to knowledge, experiences, and feelings that she might otherwise have chosen to avoid. In doing so, perhaps she intends to shift the meaning onto her own practice of painting. Although the concept of “painting” is filled with ideas about tradition, authority, genius, and masterpieces, it is still just a common noun, a huge dark zone that is ready to be explored. The fact that we have yet to understand the workings of our brain fills us not with dark despair, but with the light of investigation. Similarly, having traversed her “girls in uniform” period, Sunny Kim is now ready to leap into her new mission. Perhaps, like Haruki Murakami, she believes that the capacity of our “high-powered cerebral cortex” is derived from such abstract thought, a vital component of the creative process.5 Other artists have acknowledged the significance of this factor in the production. For example, discussing his own theory of creation, Gerhard Richter said:

“When I paint an abstract picture (the problem is very much the same in other cases), I neither know in advance what it is meant to look like nor, during the painting process, what I am aiming at and what to do about getting there. Painting is consequently an almost blind, desperate effort, like that of a person abandoned, helpless, in totally incomprehensible surroundings—like that of a person who possesses a given set of tools, materials and abilities and has the urgent desire to build something useful which is not allowed to be a house or a chair or anything else that has a name; who therefore hacks away in the vague hope that by working in a proper, professional way he will ultimately turn out something proper and meaningful.”6

Despite some poetic exaggeration, Richter’s statement seems to summarize what it means to be an artist making a painting. To the viewers, Kim’s recent works, presented under the grand title of Leap in the Dark, seem to be complete artworks of superior aesthetic quality. But to the artist, they must be manifestations of the ambiguity, anonymity, purposelessness, nonexistence, and insecurity of the painting process, imbued with all of the desperate effort, judgment, and emotion contained in every step. Or perhaps the paintings themselves exerted pressure on her. Either way, Sunny Kim did not try to hide or overcome these aspects of the creative process, nor does she exaggerate or beautify her artistic capacity. Instead, she ardently activated these negative qualities as elements of her work, concentrating on transforming them into an aesthetic style.

The three recent works that most clearly demonstrate this sensibility are Well, Reflect, and Encounter, which resemble landscape paintings with a dark tone, if they must be classified. In truth, they are very different from conventional landscapes, but they also cannot be called abstract or conceptual paintings. In terms of the theme, they lie on the boundary between landscape paintings and abstract paintings, or perhaps they alternate between the two, dynamically swapping genre conventions. For example, the lower part of Well contains an incomprehensible line that is cut very abruptly, with rough brushstrokes underneath. Meanwhile, the upper part of Reflect is largely achromatic, and the depicted valley of the landscape is neatly divided with a vertical line. Finally, about one-third of the canvas of Encounter consists of a dark, dingy area, showing traces of the downward flow of the paint. Most viewers, being accustomed to the conventions of balance, harmony, and moderation, will likely be embarrassed or aghast to see these paintings, which willfully break the harmony of the scene, confuse the motif of the landscape, and interfere with the viewer’s satisfaction of being immersed in the virtuality of the image. But Kim said that the paintings “had to be that way, they couldn’t have been otherwise.”7 According to her, she began Well with only a fragmentary idea of painting a well surrounded by rocks in the upper part of the canvas, an unconventional composition. Then, while she was painting, she experienced a certain state in which the work itself seemed to be leading the process. Feeling the need to include this odd sensation in the work, she depicted the dizzying traces of confusion, frustration, compromise, persuasion, and success that she experienced. Like the works of El Greco, she sought to give her viewers a more substantial and physical experience of the work, beyond simply gazing at an imaginary landscape. Thus, rather than striving to conceal the fact that Well is a painted presence, she openly confesses to the chaos and absurdity that are churning just beneath the surface of the finished work. The aforementioned elements of Reflect (i.e., the achromatic area and vertical lines) and Encounter (i.e., the dark area and flow of paint) can also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On one hand, these details are included in the landscape as visible elements on the canvas. But at the same time, they testify that the landscape is neither an imitation of nature nor a representation of reality; it is rather a creative performance, both the act and achievement of an artist who leaped into the dark path of creation. In these works, Sunny Kim is attempting to verify her painterly existence, an agenda that is at odds with the mechanical objectivity of photography. In the process, she subverts the myth of a painting as the result of a genius’ subjectivity. The conventional ideology of art history simply cannot be applied to her paintings, which were created by her willingness to abandon convention in favor of uncertainty.

Hints of Kim’s desire to verify her painterly existence can also be seen in earlier works, such as Under the Purple Sky, Dark Clouds, and Waterfall. These paintings contain certain forms, rendered with expressive brushstrokes, but what exactly are they? Misty mountains at dusk? A mass of clouds before a downpour? Waterfalls beneath an overcast sky? These paintings seem to have been made before the artist firmly committed herself to an aesthetic style, and they do not fully convey the artist’s confession that they are paintings. Instead, they function by conveying traces of the artist’s contemplation, or by psychologically or emotionally enticing the viewer. Although Kim’s artistic concept may not have been fully developed at the time she created these works, they definitely feature provocative and experimental elements that go beyond the mere depiction of forms.

6. Integration in Painting, like an MRI and Tomography
“Would writing be to become, in the book, legible for everyone, and indecipherable for oneself?”8

As referred to at the beginning of this essay, my position is that Sunny Kim’s artwork can be divided between the early and recent. From this perspective, I reviewed her work over the past 16 years. 2012 is the clear year of that divide. That year, she began moving away from the canvas with performance works such as Still Life (2012, Culture Station Seoul 284) and Landscape (2014, Incheon Art Platform), which delineated various media and genre conventions. They can be called “performance works” for the sake of convenience, but there is no simple term to describe these works, in which Kim articulated and self-replicated her previous paintings. Kim has explained that Still Life and Landscape were originally intended to be part of a trilogy exploring the nature of contemporary painting, along with a piece called Portrait that has not yet been realized. Still Life and Landscape may be thought of as the outcome of Kim’s journey, in which she departed from the primary path to painting in order to return to it via a different route. To make an unusual analogy, this process is reminiscent of an MRI (magnetic resonance imaging) that makes images of our body or brain. Unlike X-ray photography, MRI involves taking many cross-sectional photos from various angles and then combining them to create a comprehensive three-dimensional image that can greatly enhance our observation and understanding. In a similar way, Sunny Kim has meticulously contemplated every aspect of her early paintings of “girls in uniform”: her images, creative methods, materials, expressive techniques, apparatuses, etc. Prior to 2012, her paintings were indiscriminately executed or lumped together, but she has since begun to divide them by their themes, elements, methodologies, and qualities, and to look into them with different sensory devices.

This work is exemplified by Landscape, which Kim performed six times at the Incheon Art Platform, from May 23 to 25, 2014. With the audience looking straight ahead, images of Kim’s landscape paintings were projected in the center of a dark stage. Three girls appeared, looking as if they had been cut out of the Girls in Uniform painting series. They wore white blouses, black skirts, black socks (pulled up below the knee), and black loafers. In a situation outside of any specific time or space, with no clear context or narrative, the girls made very subtle and ambiguous movements, as if they are in a vacuum. Sometimes they slowly approached the projected landscape, or they walked towards the audience, placing their hands around their mouth as if to shout into the crowd. Obviously, they are people, not a landscape, but the viewers come to feel as if the girls are permeated with the faint tones and colors of the background landscape. At the same time, the silent landscape seems to come alive, as if it is breathing through the nuances of the girls’ gestures and clothing.

This is the sense that I experienced while watching the performance, and it is what I remember most today. As usual, the specific details or inessential aspects have faded into oblivion. To me, the performance sliced the conventional lump that we call painting into topological cross-sections, which were then reassembled along the axes of time and space. This is what I remember, in any case. If memory is who we are, then the I who remembers Sunny Kim’s Landscape am nothing but the subjecthood of memories formed by Sunny Kim’s Landscape. It does not matter if those memories are big, small, many, few, strong, weak, rough, or subtle. It does not matter if Sunny Kim was present, or if she experienced similar sensations, for these are the memories and the existence built through the artwork. In “girls in uniform,” Sunny Kim could not avoid passiveness, due to the absence of memory and experience. Then, by pushing her painting into darkness, she contributed to forming the experiences of other people. Thus, she became the active subjecthood who, like Hansel and Gretel, leaves a trail of big and little pebbles that will not be lost in the forest of memory and oblivion. Relating to Maurice Blanchot’s thought about writing, if Sunny Kim must continue painting “seen by everyone and indecipherable to herself,” she will continue to do so.

1. John Berger, The Success and Failure of Picasso, translated by Kim Yunsoo, Seoul: Mijinsa, 1989, p. 39. The original text from:http://www.learn.columbia.edu/monographs/picmon/pdf/art_hum_reading_49.pdf2. Pascal Quignard, La Haine de la Musique, Korean trans. Kim Yujin, (Seoul: Franz, 2017), pp. 10-11. According to Quignard, ancient Greeks used the word physis, meaning “nature” or “growth,” as a euphemism for the penis.
3. Ivan Izquierdo, The Art of Forgetting, Korean trans. Kim Youngseon (Paju: Prunsoop Publishing, 2017), pp. 20 and 28. The former idea is from neurobiologist James McGaugh, while the latter is from philosopher Norberto Bobbio.
4. Gerhard Richter, Gerhard Richter-Writings 1961-2007, eds. Dietmar Elger and Hans Ulrich Obrist (New York: D.A.P, 2009), p. 45.
5. Murakami Haruki, 기사단장 죽이기 (Killing Commendatore) Vol. 1, Korean trans. Hong Eunju (Paju: Munhak Dongne Publishing Group, 2017), p. 432. Menshiki, one of the major characters of this novel, speculates that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our brain comes from abstract and metaphysical thought, a necessary condition of our inability to fully comprehend the brain’s function or capacity.
6. Gerhard Richter, ibid., p. 142.
7. From my conversation with Sunny Kim on July 20, 2017.
8. Maurice Blanchot, The Writing of the Disaster, trans. Ann Smock (Lincoln and Londo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86), p. 2.
피동과 능동이 합작하는 회화 – 써니킴의 그림, 실천, 방법에 관한 미학 담론
강수미 (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1. 즐거움
회화처럼 역사가 오래된 예술일수록 사람들은 진보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런 이들의 감각과 인식 속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든 그림은 무조건 좋고 명작이다. 반면, 21세기 현대미술가가 실험적으로 그린 회화는 언제나 이미 미성숙하고 난삽한 것으로 판단된다. 예술에 대한 관념 또한 파격적인 해석을 담은 새로운 미학보다는 관습적으로 통용되어온 논리, 개념, 이론적 내러티브를 선호하는 경향이 크다. 가령 일반인들 사이에서 미술사의 화가들은 모두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고 사람들은 천재인 그들(거의 전적으로 유럽, 백인, 남성)이 그 단어에 담긴 뜻처럼 ‘하늘이 내린 재능’ 덕분에 뮤즈로부터 영감을 받아 위대한 작품을 창조했다는 신화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인간 이성이 쌓아올린 문화가 빛을 발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피카소가 “모던 회화에서의 연구라는 말” 대신 자신은 “발견”을 중시한다고 한 발언을 거듭 회자하고,1 고흐는 자신의 천재성에 고통 받았기에 그런 엄청난 그림들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라 믿는 식이다. 바스키아의 낙서화가 그토록 자유분방하고 묘한 에너지를 품은 것은 소수자의 외관을 한 (거리의) 천사가 작가의 내면에 불어넣은 영감 덕분이라는 등등 말이다. 천재, 재능, 뮤즈, 영감에 의한 비밀스런 창조 같은 개념이 거의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 아래 정리된 특정 관점의 미학적 주장이라는 점은 개의치 않고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좀 충격적이고 과격한 예술-뮤즈론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전개한 논리다. 그는 바쿠스 축제에서 주신(酒神) 바쿠스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래하고 연주하느라 손과 입이 바쁜 뮤즈의 모습을 “고객의 음경(physis)을 부풀리고 아랫배에 닿을 정도로 세워 사정에 이르게 하는 창녀” 같다고 서술했다.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가 비판적 현대 음악 미학서라 할 『음악 혐오』에서 고대 희랍 철학자의 그 같은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인용을 통해 키냐르는 작품 창작이 자유로운 예술가의 능동적 행위만은 아니라는 점, 창작 행위의 모든 것이 “어딘가에 매여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싶어 한다. 키냐르에 따르면 그 매여 있음이 곧 “슬픔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예술가의 기억/영혼과 작품들에 슬픔의 구속은 “술독 바닥의 찌기”처럼 가라앉아 있다.2 앞서 예술/예술가에 대한 오래된 믿음과 신화적 서사를 간직하고 싶은 이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뮤즈론은 환상을 깨는 선정적 비유일 것이다. 그리고 키냐르의 창작론은 뭔가 답답하게 읽힐 것이다. 예술 창작의 자유, 감상자의 미적 향유(aesthetic pleasure), 그 모든 즐거움을 두고 하필 슬픔에 옥죄인 찌꺼기라니…

2. 스케치
이제 써니킴의 미술을 논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나의 비평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고 가능하다면 깊게 탐구하고자 하는 논제가 바로 ‘가장 오래된 예술’ 중 하나인 ‘회화’를 써니킴이라는 작가가 지금 여기서 행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창작과정에 내재한 방법론, 뮤즈의 영감 같은 거창한 후원은 고사하고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성공하리라는 작은 보장도 없이/없지만 어둡고 불확실한 걸음에 걸음을 더하고 더해 작품을 완성해가는 그 길에 관해 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논제는 비단 써니킴에게만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 거의 모든 동시대 예술가를 대상으로 논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한편으로 그렇게 예술의 보편적 문제라는 점에서 여기 우리의 비평이 초점을 맞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써니킴이 2012년을 기점으로 집중적으로, 그러나 자신의 페이스로 천천히 수행해가고 있는 회화의 과제는 오로지 써니킴만의 방식과 결과로 이어진다. 보편성으로 용해되지 않는 개별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이 글의 목적과 의도가 여기 있다. 요컨대 본문에서 나는 써니킴이 최근 5년 사이(왜 시간을 나누는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회화를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는(왜 간단히 ‘그림을 그렸다’로 명시하지 않고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지도 차차 드러날 것이다) 내용 및 그 과정/결과로서 작품을 미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관습화된 예술 관념의 프레임 바깥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명의 작가가 컨템포러리 페인팅 작업을 통해 성취하고 있는 것과 그 창작의 여정 및 방법론에 관해 이해해볼 것이다. 미리 말하건대 거기서는 초월적 천재성이 아니라 작업 주체의 경험적이고 수행적인 질문과 회의(doubt)가 핵심이다. 또한 화가의 정수리든 손끝이든에 깃드는 뮤즈의 영감 대신 현실적 노고의 제작 행위, 창작의 완벽한 자유 대신 그것을 막는 비가시적인 힘들의 구속, 그에 맞서면서 또한 조응하는 작가의 부단한 시도가 관건이다.

3. 명시적인 것과 그 반대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2001년, 써니킴은 서울 갤러리 사간에서 《교복 입은 소녀들 Girls in Uniform》이라는 첫 개인전을 통해 한국 미술계에 등장한다. 1969년생인 작가는 당시 삼십대 초반이었다. 그런 그녀가 들고 나온 작품은 전시 제목처럼 지나간 시대의 교복 입은 소녀들을 마치 훼손된 흑백필름을 인화한 사진처럼 그린 것이다. 전체적인 인물의 형상은 남아있지만 콧날이나 손가락 등 세부는 흐릿하고, 풍경은 아예 없거나 강한 명암대비로 파편화됐으며, 빛과 어둠의 날카로운 대립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그림들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 작품들에서는 차갑고 건조한 느낌이 아니라, 그리움과 아련함과 포근함과 안타까움 같은 정서들이 뒤섞여 배어나오는 듯 했다. 얼핏 일제 강점기 조선의 여학생들이 떠오르지만, 교복 스타일 등 좀 더 사실에 입각하자면 1970~80년대 개발도상국 한국의 여학생들을 그린 것 같은 그림. 그것은 작가 자신의 과거 같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20세기를 보내고 이제 막 새로운 밀레니엄을 시작한 시공간과 맞지 않았다. 요컨대 그 그림들은 써니킴의 지나간 경험이나 기억의 이미지도 아닐뿐더러, 비록 IMF 사태를 겪었지만 꽤나 부유해진 2000년대 한국의 화려한 현실을 비추는 거울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써니킴의 초기작들(형식상 초기와 최근으로 구분하자면)이 지닌 핵심이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교복 입은 소녀들》은 그렇게 화가 자신의 기억도 아니요 현실도 아닌 것, 과거의 이미지임에는 분명하나 지금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성격의 이미지를 화면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왜 그것을 그렸을까?

써니킴은 중학교 2학년인 1983년 경 가족과 함께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간 재미교포 1.5세대다. 거기서 내내 성장했고, 뉴욕 쿠퍼유니온 대학에서 회화를, 뉴욕 헌터 칼리지 대학원에서 종합매체를 전공해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신진작가로 막 나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던 그녀는 1998년 개인적인 사정으로 귀국해 서울에 정착했고,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 미술계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따지자면 이민에서 리턴까지 십 수 년 동안의 한국은 써니킴에게 공백이고, 경험이 부재한 시간이며, 따라서 사적인 기억이랄 것이 없는 텅 빈 공간이다. 하지만 그녀가 청소년기 중 어느 애매한 시기에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났다가 15년 이후 다시 한 번 자기 의지를 벗어난 상황 때문에 갑자기 귀환한 이곳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은 기이하게도 그 공백, 부재, 텅 빔 안의 존재(했으리라 추측할만한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없는 그 때, 그 곳에서 이런 소녀들이 저런 모습으로 이러저러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식의 과거 가정법 진행형. 1980년대 한국에서 여자중고등학교를 다니는, 경주 같은 곳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고택 처마 아래 단정한 포즈로 친구들과 단체사진을 찍는, 칼라가 넓고 허리가 살짝 들어간 흰 상의와 검정색 치마를 입고 다소곳하지만 싱그러운 미소를 띠며 정면을 향해 서는 단발머리 그녀(들). 말 그대로 ‘교.복. 입.은. 소.녀.(들)’ 그 경험담 또는 이미지는 써니킴의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기억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망각된 것 또한 아니다. 신경생물학자 이반 이스쿠이에르두(Ivan Antonio Izquierdo)는 저서 『망각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은 동료 연구자와 철학자의 주장에 동의하며 인용한다. “기억의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망각”이며,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3 그것이 옳다면, 써니킴의 그림은 기억과 망각의 관계로 포착할 수 없고 작가의 사적 기억은 물론 주체성이 부재하는 어떤 영역/층위를 표상하고 있다고 해석 가능하다. 그것은 한국의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기억↔망각 영역/층위겠지만 써니킴은 포함, 공존, 동반 되지 않는/할 수 없는 시공이다. 작은 단서지만, 영어 ‘uniform’과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교복’이라는 전시 제목부터 써니킴과 그때 그곳의 소녀들 간 부재 와/또는 거리감이 읽히지 않는가. 그러나 더 큰 차이가 있다.

《교복 입은 소녀들》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인물을 기록하거나 과거를 보고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 아니다. 존재의 흔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작가는 다소간 흔해빠지고 양식화된 옛 사진들을 불완전한 형상(figures)으로 재현함으로써 개인을 넘어서 작동하는 시대의 상실, 사회적 기억 안에 침전된 시차(parallax view), 인간 현존의 부박함 같은 것을 건드렸다. 그런 것들은 매우 추상적이거나 심리적이어서 시각화하기가 모호하고 논리화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스테레오타입 이미지, 현재에 잔존하는 사물들과 주변 환경, 일상적으로 느끼지만 또한 무의식적으로 흘려보내는 부박한 감정과 지각의 조각들이다. 이를테면 아주 명시적인 것들이자 반대로 그만큼 비가시적이고 복합적이며 다층적인 동시에 다자적인 힘들의 작용이다. 나는 써니킴의 초기작이 당시 작가 스스로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영감의 영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 같은 것들을 추적하고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작업하는 와중에 써니킴 자신에게 던져졌을(누가 질문하는가? 작업 자체가.) 질문을 가정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즉 어떻게 캔버스에 개인적인 사실의 경험과 기억을 넘어선 내용을 그릴 것인가? 시차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회화가 강제하는 표현조건 속에서 가시화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가장 오래되고 보수적인 장르인 ‘회화’가 동시대 지금 이곳의 한 화가에게 던지는 미션으로 부상했을 것이다. 겉으로야 《교복 입은 소녀들》이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를 자극하는 추억의 사진을 심플하게 재 형상화한 회화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 써니킴은 당시 그 미션을 자각하기 전이었고, 어느 시점까지는 꾸준히 교복 입은 소녀들을 여러 배경과 모티프로 변주하면서 작업들을 쌓아올리는 데 집중했던 것 같다. 그러나 2012년 이 작가는 과감하게 평면을 벗어나 다양한 경로의 문들을 두드려가면서 ‘회화’라는 중심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평면이 대변하는 ‘회화’ 프레임을 벗어나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다양한 표현, 매체, 해석의 방법론으로 우회하여 다시 ‘회화’로 진입해가는 경로다. 자신이 ‘한국’에 백 앤 포스(back and forth) 한 것처럼.

4. 존재의 인정
《교복 입은 소녀들》에서 써니킴이 자료(source)로 쓴 사진은 레디메이드 이미지다. 그 사진들은 작가의 개인 앨범이나 가족 앨범, 혹은 사회적 ․ 역사적 다큐멘트의 일부가 아니며, 그렇게 이름이 밝혀져 있지도 인덱스 되지도 않은 것들이다. 그런 만큼 익명적이고 의미와 기능이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 작가가 경험하지 않은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 ‘지금 여기 나/우리’를, 그러나 타인에게는 ‘그때 거기 소녀/소녀들’로 인지될 수밖에 없는 특정 존재(presence)를 약하고 끈질기게 증명한다. 다른 무엇으로 유보하거나 대체 불가능한 존재(being)로서. 이미 써니킴의 회화 작업을 통해 형상이 변주되고, 의미가 변경되었다하더라도 그렇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1960년대 중반에 벌써 데생 또는 드로잉의 도구로서 사진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 회화에 사진의 본질을 전이시키는 파격적 실험으로 오늘날 생존하는 회화 거장이 되었다. 그의 생각을 인용하면 “사진은 절대적이고, 따라서 자율적이고 무조건적”4이다. 그럼 그런 속성을 가진 사진을 원재료 삼아 그림을 그렸던 써니킴의 입장에서 상상해보자. 소녀(들)의 존재성은 키냐르처럼 표현하면 예술가를 ‘슬픔으로 사로잡는 것’이 아니겠는가. 달리 말해 교복 입은 소녀들 ‘사진’은 그 절대적이고 자율적이며 무조건적인 매체적 속성으로 화가의 자유로운 창작을 구속했을 것이다. 물론 써니킴은 아마도 1990년대 말에서 2000년 초 언저리에 자유로운 표현 욕구와 창작 의지에 따라 《교복 입은 소녀들》을 그렸다. 능동적으로. 하지만 동시에 그 그림들은 써니킴이 현실의 시공간에서는 사라진, 그녀의 사적 경험과 기억의 저장고 안에는 없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슬픔(그것이 센티멘털만 의미할까?)’이 깔려있는 시공간을 담은 사진이라는 라이트모티프(“교복 입은 소녀들”)에 이끌리고 그에 의해 작업이 이뤄진 결과이기도 하다. 피동적으로.

능동과 피동의 합작. 그것이 내가 파악하고 공감하는 써니킴 회화 작업의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먼저, 방금 전에 분석한 것처럼 존재론적 차원에서 작가가 외면할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소녀들의 현존(‘지금 여기 있음’에서 ‘한때 거기 있었음’까지)에 얽매인/피동 상태로부터 자신의 예술표현능력과 미적 판단을 발휘/능동적으로 행위 하는 작업 체제다. 다른 한편, 리히터의 경우처럼 ‘사진’이라는 매체의 객관적이고 즉물적인 속성을 작가의 주관성 과/또는 사변을 통제하는 조건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그러한 피동의 조건들로부터 탈주하는 주체의 우발적이고 능동적인 그리기를 적극화하는 방식이라 평할 수 있다. 요컨대 능동과 피동의 먹임-되먹임(feed-back)으로서 회화 창작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든 존재의 인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가령 자신에게는 텅 비고 부재하지만 분명 있었던 사람들, 시간들, 삶들, 경험들, 기억들, 이미지들, 장치의 힘, 표현의 에너지, 행위의 욕구 등등. 그리고 이러저러한 요소와 영향이 수렴되고 발산하는 주체로서 나, 써니킴.

5. 어둠에 뛰어들기
시리(Siri)가 아이폰 사용자의 취향과 마음까지 읽고 음악을 선곡해주는 시대. 자기주도 학습형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묘수를 두며 세계 최고 프로 바둑 기사들을 차례로 무릎 꿇리는 시대. 그런 AI를 하루가 다르게 더 큰 기술력으로 도약 확장시키는 능력을 맘껏 발휘하는 인간들의 시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를 이렇게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아이러니한 사실은 고도의 테크놀로지 개발에 성공하고, 심지어 그런 기술 성과들이 인간 자신조차 압도하는 현실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류는 자기 뇌의 대부분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뇌과학 연구에서 인간의 뇌는 아직도 규명해야 할 것이 산더미인 미지의 세계라 한다. 가령 우리가 어떤 행위, 어떤 생각을 할 때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활동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자기 의지대로 사용하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다만 최근 뇌 영상촬영기술인 fMRI(기능성 핵자기공명영상)나 PET(양전자 방출 촬영)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한 사고를 할 때조차 다양한 뇌 영역을 동시에 활성화시켜 사용한단다.

써니킴의 미술을 논하다가 갑자기 왜 ‘뇌과학’이라는 샛길로 빠지나 의아해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은 이제부터 집중해 논하려는 이 작가의 최근 작업 때문에 그런 이야기로 사전 포석을 두었다. ‘Leap in the Dark’ 이것이 넓게 잡으면 2012년경부터 현재까지 써니킴이 하고 있는 창작의 주제이자 제목이다. 영어 관용구로써 ‘앞을 알 수 없는 일, 과정과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일에 [모험적으로] 뛰어드는 행위’를 일컫는다. 작가는 최근 자신이 그 언어 표현처럼 작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그러하다. 쉽게 말해 써니킴은 이미 손에 익은 능수능란한 제작 과정은 물론 완성될 그림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나 계산을 의식적으로 피한다. 반대로 그림이 자체로 되어가는 과정 또는 작업을 해나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고 경험한 적 없으며 느껴보지 못했거나 피했을 법한 현상/사건/상태/심리/지각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고 그 어려움(어둠)에 스스로를 던진다. 이유가 무엇인가? 작가가 똑같이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 써니킴은 전통과 권위와 천재와 거장들로 꽉 차 보인다 하더라도 사실 일반명사 ‘회화’는 거대한 암흑지대처럼 더 탐구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회화 실천에 의미를 걸겠다는 뜻이 아닐까. 마치 우리 뇌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또는 어디까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사람들이 어두운 절망 대신 탐구의 빛을 보듯이 말이다. 써니킴은 ‘교복 입은 소녀들’ 시기를 지나 그렇게 새로운 미션 수행 단계로 뛰어든 것 같다. 그만한 능력이, 그만한 “고성능의 대뇌피질이”5 그녀에게 있어 추상적 사고는 물론 추상적 경로를 요구하는 창작에도 기꺼이 응하는 것이리라. 이는 다른 화가의 경우에도 벌써부터 의식된 과제거나 회화 작업의 특수성인 것으로 보인다. 1985년 5월 18일 리히터는 이미 다음과 같이 자신만의 창작론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추상화를 그릴 때(다른 경우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나는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기 과정 동안 무엇을 목표로 하고, 거기 도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미리 알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회화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서 버림받고 희망도 없는 사람의 거의 맹목적이고 필사적인 애씀이다. 도구, 재료, 능력이 주어졌고 그리고 의미 있고 유용한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는 다급한 욕망도 갖췄지만, 그 무엇이 집이나 의자가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이미 이름이 있는 어떤 것도 아닌 것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타당하고 전문적인 방식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는 올바르고 의미 있는 어떤 것을 생산할 것이라는 모호한 희망을 가지고 헤쳐 나간다.”6

자못 시적 과장이 끼어든 듯 읽힌다. 그러나 실제 그림을 그리는 작가 입장에서 위와 같은 생각은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닐 것이다. 써니킴이 《어둠에 뛰어들기 Leap in the Dark》라는 큰 타이틀 아래 우리에게 제시하는 최근 그림들은 우리 눈에 충분히 완성됐고 작품으로서 높은 미적 질(aesthetic quality)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 그림들은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 전반에서, 필사적으로 애쓰며 판단하고 느끼는 작업과정의 굽이굽이에서 모호함, 익명성, 무목적성, 비존재성, 불안정성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아니, 그렇게 그녀를 압박했을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써니킴이 바로 그 같은 회화 창작의 속성들을 감추거나 극복하는 데 급급해하지도 않고, 자신의 예술능력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도 않았다는 데 있다. 대신 그녀는 그 부정적 성질들을 작품의 요소로 적극화하고 미적 형식으로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한 면모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작품이 가장 최근작들인 <우물 Well>, <비추다 Reflect>, <조우 Encounter>다. 세 작품 모두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와 분위기로 그려진 풍경화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그렇다는 말인데, 좀 더 냉철하게 구분하자면 그 그림들은 전형적인 풍경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추상화나 개념회화 또한 아니다. 장르적 경계로 보면 그 양자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혹은 장르적 관례를 서로 스위칭 하는 역학의 회화다. 예컨대 <우물> 하단에 매우 갑작스러우면서도 이해 불가하게 가해진 단절선과 그 밑의 거친 붓 자국, <비추다>의 상단을 가로지르는 무채색의 면과 계곡풍경(꽤 멋지게 그려진)을 좌우로 쪼개는 수직선, <조우>의 화면 중 거의 1/3을 가리는 상단의 거무죽죽한 면과 물감이 흐른 자국이 조화와 균형과 절제라는 회화 관습에 익숙한 감상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것들은 화면의 조화를 깨뜨리고, 풍경이라는 모티프를 혼란스럽게 하며, 보는 이가 이미지의 가상성에 흡족히 잠기는 순간을 방해한다. 하지만 그 그림들을 그린 작가가 말하길 “그것들은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7 부분들이다. 써니킴에 따르면 <우물>에 착수할 때 단편적 아이디어(통상적이지 않게 캔버스의 윗부분에 바위로 둘러싸인 우물을 그리자!)만 가지고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어느 순간 자신이 아니라 ‘그림’이 작업을 주도하는 양상을 겪었다. 작가는 그 과정에서 경험한 여러 혼란과 좌절과 타협과 설득과 성공의 어지러운 흔적을 작품의 내용으로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것이 감상자에게는 풍경을 그린 가상의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엘 그레코의 회화처럼 실체적으로 느껴지길 바랐다. <우물>이 그려진 존재임을 숨기지 않고, 작가가 최종적으로 그린 최상층 화면의 기저에 카오스처럼 혹은 무(無)에 가까운 행위들이 깔려있음을 고백함으로써. <비추다>의 무채색 가로띠와 수직선, <조우>의 흐린 화면과 수직으로 흘러내린 물감자국들 또한 세세한 경위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이다. 그것들은 한편으로 캔버스 화면 위 가시적 요소로써 풍경에 포함돼 있지만, 다른 한편 그 풍경이 자연의 모방/실재의 재현이 아니라 어두운 창작의 경로로 뛰어든 이의 창작 퍼포먼스(행위이자 성과)를 증거 한다. 그에 대해 나는 써니킴이 시도하고 있는 ‘자기만의 회화적 존재 증명’이라고 미학적 판단을 내리고 싶다. (기계적) 객관성으로서 사진과는 다른, 마찬가지로 (천재적) 주관성의 산물로서 회화 신화를 벗어던진 회화의 존재 증명. 그런 이데올로기가 타당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동시대에 한 명의 작가가 자신을 불확실한 과정에 맡겨 그리는 그림으로서.

위 세 작품보다 앞서 그린 <자줏빛 하늘 아래 Under the Purple Sky>, <어두운 구름 Dark Clouds>, <폭포 Waterfall>에서 전조를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단호하게 미적 형식으로서 자기를 주장하기 전 단계에서 형상(해질녘 산안개? 무거운 비를 내리는 구름덩어리? 폭포를 내리누르는 회색하늘?)을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고, 표현적인 붓질 같기도 한 화면 처리 부분이 그렇다. 그것들은 그림임을 자기 고백하는 목적보다는, 작가의 고민의 흔적이거나 감상자로 하여금 심리적 과/또는 정서적으로 그림에 이끌리도록 하는 효과로써 작용한다. 조금 냉정하게 평가하면 미적 형식으로 발전하기에는 당시 써니킴의 작업 개념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형상 묘사에 그치기에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요소로서 말이다.

6. 회화를 MRI처럼 단층화하고 종합한다면
“글쓰기는, 책 속에서,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것이 되고, 그 자신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는가?”8

서두부터 나는 써니킴의 미술을 초기와 최근으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고, 그런 관점에서 지난 16년 동안의 작가 작업을 분석했다. 그 명시적 분기점은 2012년이다. 써니킴의 작품으로 따지면, 캔버스를 벗어나 다양한 매체와 장르적 컨벤션을 방법적으로 절합한 퍼포먼스아트인 《정물》(2012, 문화역서울284)과 《풍경》(2014, 인천아트플랫폼)이다. 편의상 그 작품들을 ‘퍼포먼스아트’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하더라도, 내 생각에 그것들은 기성의 이름에 귀속되지 않고, 써니킴의 이전 회화로부터 자가 증식했거나 절합한 것들로서 분석해야 더 정확하다. 작가가 이미 깨닫고 밝혔듯이 당시 《정물》, 《풍경》은 나중에 올(하지만 현재도 실현되지 않은) 《초상》과 함께 삼부작으로 만들어져 동시대 회화가 무엇인지를 탐구할 목적을 태생적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어딘가에서 썼듯이 써니킴이 ‘회화’를 중심에 두고 그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른 경로로 우회해서 다시 ‘회화’로 돌아온 과정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정물》, 《풍경》인 것이다. 그 방식은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병원에서 우리 뇌나 몸을 단층으로 나눠 찍는 MRI(자기공명영상)을 떠올리게 한다. MRI는 알려져 있다시피, 엑스레이 촬영과 다르게 다양한 방향에서 단층 촬영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이미지를 확보해 관찰과 이해를 도모한다. 우리는 써니킴이 ‘교복 입은 소녀들’을 그린 자신의 초기작부터 2012년 즈음까지 지속해온 그림의 이미지들, 창작 방식들, 질료들, 표현 기교 및 장치들 등을 MRI 같은 방식으로 성찰하지 않았을까 유추할 수 있다. 즉 그때까지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거나 무차별적으로 실행되던 자신의 회화 작업을 주제들로, 요소들로, 방법론들로, 성질들로 분할하고 다른 감각장치들로 들여다봤다고 말이다.

대표적으로 2014년 5월 23일에서 25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총 6회 공연을 행한 《풍경》을 들 수 있다. 어두운 공연장의 정면(관객석의 반대)에 써니킴이 그린 풍경화가 영상으로 투사되는 가운데,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 그리고 무릎 밑까지 오는 검정색 양말과 검정 단화를 신은 세 소녀가 퍼포먼스를 펼친다. 마치 써니킴의 《교복 입은 소녀들》 시리즈 중에서 오려낸 듯한 느낌의 소녀들은 정확한 시간과 공간, 또는 분명한 맥락과 스토리텔링이 부재한 상황들에서, 마치 진공상태에서처럼 매우 정적이고 아련하게 움직인다. 때로는 정면 스크린의 풍경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때로는 관객석을 향해 ‘야호’를 외치는 것 같은 자세와 표정으로 걸어 나오면서. 분명히 그녀들은 풍경이 아니고 사람인데, 관객은 그 소녀들이 배경의 흐릿한 톤과 칼라에 스며드는 것처럼, 반대로 벽 위로 투사된 침묵의 풍경그림이 소녀들의 몸짓과 의복과 풍기는 뉘앙스를 통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낀다.

내가 당시 객석에 앉아 경험한 것, 지금 이 글을 쓰며 기억해내는 감각이 그와 같다. 아주 세부적이거나 지엽말단의 것들은 망각의 강으로 떠밀려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풍경》을 감상하던 당시 나는 그 공연이 마치 ‘회화’라는 관습적 덩어리를 위상학적으로 단층화하고 다시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조립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으며 현재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철학자 보비오의 말처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면, 써니킴의 《풍경》을 기억하는 나는 곧 써니킴의 《풍경》을 통해서 형성된(그것이 얼마나 크거나 작은가, 많은가 적은가, 강한가 미약한가, 거친가 섬세한가는 중요치 않다) 기억의 주체일 것이다. 그것은 써니킴이 거기 그때 있었든 아니든, 작가가 직접 경험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예술작품을 통해 구축된 기억이며 실재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 긴 비평의 마지막 말이 도출될 수 있다. 요컨대 ‘교복 입은 소녀들’에서 공백의 경험과 기억 때문에 피동성을 피하지 못했던 써니킴은 자신의 회화를 어둠 안에서 밀고 나감으로써 타인의 경험 형성에 기여하고 기억과 망각의 프로세스에 크고 작은 조약돌(헨젤과 그레텔이 숲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준 단서인 그것)을 놓는 능동적 주체가 되었다. 비록 위 어딘가 조용히 인용해둔 모리스 블랑쇼의 사유처럼 그녀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그러나 자신만은 해독하기 힘든 그리기를 지속해야 한다 하더라도.

1.John Berger, The Success and Failure of Picasso, 김윤수 역,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미진사, 1989, p. 39. 원문 인용은
http://www.learn.columbia.edu/monographs/picmon/pdf/art_hum_reading_49.pdf2.이상 Pascal Quignard, La naine de la musique, 김유진 역, 『음악 혐오』, 프란츠, 2017, pp. 10-11 참조. 저자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남근(phallos)을 우회적으로 표현할 때 산출, 자연을 뜻하는 단어 퓌시스(physis)를 썼다.
3. Ivan Antonio Izquierdo, The Art of Forgetting, 김영선 역, 『망각의 기술』, 푸른숲, 2017, p. 20과 28. 앞은 신경생리학자 제임스 맥고(James McGaugh)의 주장이고, 후자는 철학자 노르베르트 보비오(Norberto Bobbio)의 관점이다.
4. Gerhard Richter, Gerhard Richter-Writings 1961-2007, Dietmar Elger & Hans Ulrich Obrist (eds.), d.a.p, 2009, p. 45.
5. 무라카미 하루키, Kishidancho-Goroshi Vol. 1, 홍은주 역, 『기사단장 죽이기』, 문학동네, 2017, p. 432.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멘시키는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하고 사용하지도 못하는 뇌의 능력이 그렇다 하더라도 유의미한 이유를 추상적 사고, 형이상의 가능성에서 찾는다.
6. Gerhard Richter, Ibid., p. 142.
7. 2017. 7. 20 써니킴과 강수미가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나눈 대화.
8. Maurice Blanchot, The writing of the disaster, Ann Smock (trans.),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86, p. 2.
Air of Suspicion: into the gap of time
Enna Bae (Independent Curator)

I remember Sunny Kim always looking somewhere far away. Her paintings were creating a thick border neither here nor there. This place was the land and the sea; something alive and dead; and possibly you and me. Or perhaps none of these.

In the early 1980s, the entire landscape of Korea was transformed by rapid economic growth, accompanied by major social and political shifts. In the midst of these grand changes, many Korean individuals and families were compelled to relocate. Sunny Kim was one of them. Although she dreamt of being a high school girl in a uniform, her future was interrupted when she had to leave her homeland. However, after she returned to Korea as an adult, her dream was vicariously realized through the act of painting. When I first encountered Sunny Kim’s series in 2001, I thought that the girls in her paintings were more than mere representation of lost dreams of a Korean American. My question at the time was not “what does she paint?” but rather, “why does she paint?”

At a glance, the images in Kim’s early paintings (e.g., girls in uniforms, schools, field trips, the “ten longevity symbols,” landscapes, etc.) seem to invoke the system of symbols embedded in history, encompassing our conventions, values, norms, institutions, and traditions. But Kim’s images are actually removed from that system. They look opaque and dislocated, but they emit a certain virtue. They often seem to escape the gaze of the viewer, always moving off into the distance. Through her production process, two different timelines intersect: the axis of the reproduced images, borrowed from photographs, films, newspaper scraps, or magazines, and the axis wherein those reproduced images are incorporated into binary allegories of memory and oblivion, fact and fallacy, past and present, growth and death. Through this visual and sensory collage process, the images gradually acquire a psychological three-dimensionality, taking on an air of suspicion. Kim’s meticulously manufactured images enable viewers to simultaneously experience seeing and the sensation of being unable to see, thus revealing the inherent gaps in our sight. Looking at her works, I feel that I am looking at a body without a face or a soul only left with its body. Her girls are not the girl that she could have been; similarly, her school uniforms are not the school uniform, and her landscapes are not the landscape. Perhaps her paintings are not meant to represent any images at all, but rather to serve as a catalyst for awakening the imperfect cognitive system that lies beneath logic. They might exist to enact this very instability.

It was only after about ten years that I could truly begin to ask the question of why Sunny Kim paints. Between 2012 and 2014, Sunny Kim and I produced two performances that were reenactments. In Still Life, Kim projected her own identity onto the girls in her paintings, allowing her to see the girls with her own eyes in an actual space. Similarly, she created Landscape in order to walk into the landscape that the girls saw and walked through. These two performances also reenacted time, as Kim’s painting process was realized not on a canvas, but in three-dimensional space. By transferring the images of her paintings into actual space, Kim attempted to summon the identity of an individual and the temporality of the past, which have been lost to history. But inevitably, the nature of these things can only exist by disappearing. Here, two contradictory states of mind coexist: the eagerness that she might be able to elicit memories of the past within repeatable movements and living bodies in the present, and the concurrent despair that she will not be able to achieve this. Her images seem to aspire to resuscitate that which is dead, to move that which is still, and to restore the time that has been lost. Her images remain adrift, refusing to be read in the language of the real world, as if they themselves want to evaporate, and reminding us of our inherent imperfections.

In some ways, painting is a primal act. After all, we are all capable of painting, almost from the day we are born. But painting still represents another type of language that cannot be translated into words, no matter how hard we try. Sunny Kim’s paintings look ominous, but they are also sad and beautiful. These feelings likely stem from our overwhelming sense of being unable to describe what we are seeing in words, even though it is right before our eyes, and even penetrating our entire body. This is possible not because of what her paintings are, but since they relate to a certain primordial and inherent state.Why does Sunny Kim paint? This leads me to ask another question: what are we all seeing? What continues to arise inside me? Eventually, we cannot help but think of the human condition inherent in these questions. Through her works, Sunny Kim shares such contemplations with us. I will continue to await the journey, moving towards a destination that we will reach together. Thus, I recommend her for the Korea Artist Prize, which entered into the gap of time in this process.
수상한 장면: 그 시간의 틈으로
배은아 (독립큐레이터)

내 기억 속에 써니킴은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은 여기도 저기도 아닌 아주 두꺼운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 곳은 땅이기도 바다이기도 했고 산 것이기도 죽은 것이기도 했으며 당신이기도 나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모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1980년대 초 한국의 경제성장과 급변하는 사회정치적 환경은 무수한 개인들에게 변화와 이동을 강요했고 써니킴은 그 중의 한 소녀였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을 꿈꾸던 한 소녀의 이룰 수 없었던 미래는 성인이 되어 돌아온 고국에서 ‘그리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2001년 나는 써니킴의 <Girls in Uniform> 연작을 처음 만났고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한 재미교포의 상실된 미래를 재현한다는 것 이상의 다른 무언가를 상상했던 것 같다. 그 때 나의 질문은 써니킴이 ‘무엇을 그리는가?’라기 보다는 써니킴은 ‘왜 그리는가?’에 가까웠다.

써니킴의 초기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들 – 소녀, 교복, 수학여행, 학교, 십장생, 산수화 등 – 은 얼핏 보면 역사 속에 구축된 관습, 가치, 규범, 제도, 전통과 같은 상징체계를 다루는 듯 하다. 그러나 거기에서 탈락된 혹은 상실된, 불투명하고 어긋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숙한 이미지들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외면하고 저 바깥으로 이동하고는 했다. 써니킴의 그리는 과정에는 사진, 영화, 신문 스크랩, 잡지와 같은 재생산된 이미지들을 조합하는 시간과 이 이미지들을 기억과 망각, 사실과 허구, 과거와 현재, 성장과 죽음과 같은 알레고리로 구성하는 또 다른 시간의 축이 교차된다. 이러한 시각적 그리고 감각적 콜라주 과정을 지나면서 이미지들은 점차 심리적인 입체감을 획득하고 궁극에는 매우 수상한 장면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써니킴의 완벽하게 가공된 이미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보고 있지만 볼 수 없는, 즉 ‘본다’는 행위 자체의 균열을 경험하게 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얼굴 없는 몸이거나 몸만 남은 영혼 같았다. 소녀들은 그 소녀가 아니고 교복은 그 교복이 아니며 풍경은 그 풍경이 아닌 것이다. 써니킴의 그림은 어쩌면 논리 저편에 있는 불완전한 인식체계를 일깨우는 매개자일 뿐 그 어떠한 이미지도 재현하지 않으며 오히려 스스로 그 불안정함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써니킴은 ‘왜 그리는가?’라는 질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 2012년과 2014년 사이 써니킴과 나는 두 개의 재연(Reenactment) 퍼포먼스를 만들었다. 써니킴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했던 그림 속의 소녀들을 실제 공간에서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던 <Still Life>와 그 소녀들이 바라보고 거닐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자 했던 <Landscape>는 써니킴의 그리는 과정이 캔버스가 아닌 삼차원의 공간에서 재연된 시간이기도 했다. 써니킴은 그림 속의 이미지를 실제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역사 속에서 상실된 개인의 정체성과 과거의 시간성을 현재로 소환하고자 했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의 실체는 사라짐으로써 실존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현재에 침전된 과거의 기억을 반복 가능한 움직임과 살아있는 몸으로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열망과 그러나 결코 다다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이 공존한다. 죽은 것을 살리는 것, 정지된 것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것. 그녀의 이미지들은 세상의 언어로 읽혀지기를 거부하는 듯, 스스로 증발되기를 자청하는 듯, 그리고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 그 자체인 듯, 그렇게 부유하고 있었다.

그린다는 행위는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태초의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아무리 애써도 인간의 언어로 언어화될 수 없는 또 다른 언어이다. 써니킴의 그림이 무섭고도 슬프고 그리고 아름다운 이유는 아마도 말로 옮길 수 없었던 무수한 순간들이 우리의 눈 앞에 홀연히 등장하면서 온몸으로 우리를 관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그림이 무엇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태초의 무엇이기 때문이다. 써니킴은 왜 그리는가? 이 질문은 다시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안에 무엇이 계속 되는가? 그 인간의 조건을 상기하게 한다. 이러한 사유의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써니킴과 함께 할 아직 다다르지 못한 여정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시간의 틈으로 들어온 올해의 작가상에 그녀를 추천한다.
Paintings Move and the Performers Stop
Haejin Kim

The first thing I noticed when I entered the theatre were the several columns that had been placed in front of the audience. ‘What could that be?’ The stage was still dark and only some rosy lighting illuminated the columns and seats. Before long, as the stage brightened, an image filled the wall facing the audience. At that moment, the columns became ‘something’, as they caught my eyes looking at the stage. By obstructing sight, the columns constantly reminded the audience that they were engaged in the act of ‘seeing’. On the other hand, they helped with the act of ‘seeing’, by functioning as a device to prevent us from being drawn into the landscape. Perhaps ‘seeing’ is just that – something that requires distance. Is this the reason why the girls – who had been looking at something or somewhere with their backs to the audience – came out of Sunny Kim’s painting?

The image that fills the entire screen slowly begins to move and transforms into another image, just as the thin fog outside the image changes its color corresponding to the delicate changes of the stage lighting. It looks as if fog is flowing into the painting, and also as if the fog in the painting is escaping out to the stage. The image continues to change. It is a transformation and at the same time, a disappearance. Images are disappearing into other images. This performance titled ‘Landscape’ mulls over paintings by putting them in motion. What came about from this struggle?

Performers. Navy skirts, white shirts, socks that rise up to the knees, and black shoes, all of which that reminds us of school uniform are neatly clad. Three performers become the school girls and gaze at the image. The performers’ movements become more active and the audience’s eyes begin to wander all over the theater including the screen. However, the performers were carefully controlling their movements as well as their sounds as if to protect themselves from being fully exposed. The girls sometimes would suddenly stop moving like statues as if they are part of the still image, or sometimes would all of a sudden halt their dash toward the audience making it look like the images on the screen had come to a stop. At that moment, it felt as if their bodies had been flattened by some invisible glass wall and had turned into paper dolls. And rather than being heard individually, the sounds of their voice are made collectively by them all and echo throughout the theatre as a chorus. The actors in this performance, instead of coming alive as characters, cleverly function within the space as if knights on a chessboard.

The girls, who appeared in front of the audience, are a product resulting from the artist’s struggle to transform the two dimensional space of the painting into a three dimensional space. None of these girls have individuality. We are staring at a body realized from an idea. The girls exit from their vague memories and play out a moment in time like ghosts.

The girls also take apart syllables from a poem and utter them without order. At first, I tried to make sense of what was being said, but gradually began to just observe the process of the language turning into meaningless ‘sound’ and dispersing through the space. It was quite different from being able to picture the image in my head when listening to Kim Sakkat’s poem recited by the performers earlier. A substance known as language had been visualized and was transforming into a landscape that I had never experienced before.

In ‘Landscape’, the eyes of the audience shift, like crossing a stream on stepping stones, from images on the screen, to mirrors and trees that had been placed, then to performers’ domain, then columns, and finally to the performers beyond those columns, in that order – outward starting from the innermost part of the theatre. “Landscape” in fact pushes and expands its space, little by little in an inverse perspective form, toward the audience.

In the last scene, a performer crosses the point beyond columns and takes a step forward towards the audience. At this moment, the space in which the performer roamed and ran, emerges along with the performer. Possibly because the performer is looking up into the void, the space brought out by the performer and that of the audience do not confront or compete. Instead, these spaces slide by at an angle along the performer’s line of sight.

Through ‘Landscape’, whe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ubject ‘who is seeing’ and the object being seen is not one-sided, but rather, where layers of different views overlap, I experienced the artist’s vision exploring and seeing through many different spaces at the same time. Moreover, since the performance encompassed layers of different senses, several different modes of audience perception evolved. On one hand, my mind wandered between the painting put in motion and the potential of the still landscape, pondering which better allowed the audience to freely imagine and feel. The performance carefully structured in detail by the artist was clearly seen. As for the emotions it draws from the audience, it is not as clear.
회화는 움직이고 배우는 멈춘다
김해진 (공연비평가)

극장에 들어가 처음 본 것은 객석 앞에 설치된 여러 개의 기둥이었다. ‘저것은 무엇일까.’ 무대는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고 불그스름한 빛이 기둥과 객석을 비추고 있었다. 곧 무대 가 밝아지면서 정면 벽에 그림이 가득 차올랐다. 그때 기둥은 ‘무엇’이 되었다. 무대를 바라볼 때 기둥이 눈에 걸렸기 때문이다. 기둥은 바라보는 행위를 방해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본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들었다. 또 반대로 ‘본다’는 행위를 돕기도 했다. 풍경을 보지만 풍경 안으로 침잠하지는 못하도록 하는 장치로 기능하면서 말이다. 혹시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일까. 거리를 필요로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써니 킴의 그림 속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뭔가를 바라보던 소녀들이 그림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일까.

화면 가득 펼쳐지는 그림은 서서히 움직인다. 그래서 또 다른 그림으로 변화한다. 마침 그림 밖에서 옅은 안개가 섬세한 조명 변화에 그 빛깔을 달리 하고 있다. 안개가 회화로 스며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회화 속의 안개가 슬며시 무대로 빠져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것은 변화이면서 동시에 사라짐이다. 그림이 다른 그림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풍경>이라는 제목의 이 공연은 이렇게 회화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회화를 고민한다. 이 고민 속에서 무엇이 생겨났는가.

배우가 생겨났다. 교복을 떠올리게 하는 남색 치마와 흰 셔츠,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 그리고 까만 구두가 단정하다. 세 명의 배우들은 소녀가 되어 그림을 바라본다. 이후 배우들의 움직임은 활발해지고 관객의 시선은 스크린을 포함한 극장 곳곳에 머무른다. 그런데 배우들은 자신이 전면에 드러나기를 조심스레 경계하는 것처럼 움직임과 소리를 섬세하게 조율하고 있었다. 소녀들은 그림 안에 있는 것처럼 조각상이 되어 멈추어 서기도 하고, 객석으로 달려 나오다가도 마치 화면이 정지하는 것처럼 멈춰 섰다. 순간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눌려 종이인형이 된 것처럼 배우의 몸이 납작해지는 것 같았다. 또 어느 한 명이 주체가 되어 소리내기보다는 함께 소리를 만들어 코러스로 퍼져 나가게 한다. 이 공연에서 배우들은 어느 역할로 살아난다기보다는 공간 안에서 체스의 말처럼 영민하게 기능한다.

작가가 회화라는 평면의 공간을 입체적으로 고민하면서 관객 앞에 나타난 소녀들. 이들 각자에게는 개별성이 없다. 몸을 얻은 관념을 바라본다. 소녀들은 아스라하게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유령처럼 한 때를 놀이한다.

소녀들은 시어(詩語)의 음절들을 모두 따로 떼어내 순서 없이 발음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의미를 좇아 귀를 기울였는데 차츰 그 언어들이 무의미한 ‘소리’가 되어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됐다. 앞서 배우들이 김삿갓의 시를 낭송할 때 머릿속에 펼쳐지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언어라는 물질이 시각화되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풍경이 되고 있었다.

이번 <풍경>에서 영상, 거울과 나무의 설치, 배우의 영역, 기둥, 기둥을 넘어선 배우의 순서로 관객의 시선은 징검다리를 건넌다. 극장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말이다. <풍경>은 역 원근의 형태로 점점 관객 쪽으로 공간을 확장해 밀어내는 셈이다.

마지막에 배우는 기둥의 위치를 넘어서 관객석 쪽으로 한발을 내딛는다. 이 순간 배우가 노닐거나 달리던 공간이 배우와 함께 따라 나온다. 배우가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어서인지 비어져 나온 공간과 관객의 공간은 대면하거나 대적하지 않는다. 대신 배우의 올린 시선을 디딤대 삼아 공간과 공간이 사선으로 서로 미끄러진다.

‘누가 무엇을 보는가’라는 주체와 대상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여러 층위들이 겹쳐진 <풍경>을 바라보면서 여러 공간을 동시에 꿰뚫듯이 탐험하는 작가의 시선을 나는 경험했다. 작품이 여러 층위의 다른 감각으로 겹쳐져 있는 만큼 관객에게서도 지각하는 여러 방식이 생겨났다. 한편으로 나는 회화가 영상이 되어 움직이는 것과 정지된 풍경이 가졌을 잠재성 사이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관객이 어느 편에서 더 자유롭게 상상하고 느끼는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말이다. 작가가 작품의 형식을 섬세하게 구축한 것이 잘 보이는 데 비해 그것이 관객으로부터 어떤 감정을 이끄는지는 보일락 말락 한다.
Three Dimensional Portrayal of a Landscape Painting
Kyunghwa Ahn

Man-Dae-Ru at Byeongsan Seowon (Historic Byeongsan Academic Institution) in Andong – not just a place where a magnificent view of Nak-Dong River can be appreciated, but also hailed as a structure that even captured the sounds of grasshoppers as well as the wind in its design. Seeming to have been erected in mid-air, the structure’s wooden columns, to be more precise, are an important part of the glorious landscape, along with the Nak-Dong River, Mt. Byeong, the trees, and rocks. As one’s view of the mountain and river between the columns shifts, these columns function as frames. The columns which have already become part of the landscape, either obstruct other elements from being seen, or on the other hand, act as background to allow others to stand out.

Such landscape in which a man-made architectural structure known as Byeongsan Seowon became one with the nature, was recreated on stage by Sunny Kim’s production of ‘Landscape’. While the scenic images projected on the screen represent a distant view, the seats in the audience of various heights serve as a vintage point to take in the vista such as Man-Dae-Ru, or a near distance view. Between these two views, trees and a pond, as well as columns are placed, and the landscape becomes complete with the actors’ movements on stage. The audience is easily reminded of the girls in school uniforms in Sunny Kim’s paintings by the three performers neatly clad in white shirts and black skirts. All the scenes as well as acting in this 6-part performance were thoroughly directed in order to recreate the scenes already portrayed in the artist’s paintings in a three dimensional space. Scene 4, for instance, having sunset and twilight as the theme, begins with the animated images from the paintings portraying late-afternoon scenes during a sunset. It is then followed by the stage performers enacting the poses portrayed in the painting. They take turns reciting an old poem about an imagined landscape. While walking towards the screen, a strong ray of late afternoon sunshine even casts itself on the backs of the performers. The twilight scene on the screen, the scene created by poem recited by the performers, and the scene created by all the elements on stage, these are the layers coexisting in Sunny Kim’s work.

Through her paintings, the artist has been asking questions about a perfect image which cannot be attained from a fictitious space and time, nor from the characters in that space. ‘Landscape’ – a performance where seemingly opposing counterparts such as space (void) and person (being), image and text, as well as sound and light, exist in harmony – is an experiment to discuss the true nature of painting by different means, through transposing the theatricality existing in a pictorial plane to a real space. This effort to bring out a pictorial subject from a flat surface to a real space had been attempted before in 2012 by Culture Station Seoul 284’s performance ‘Still Life’. The girls that played instruments, sang songs, and read texts in order to reenact ‘Still Life’ once again act in “Landscape” to recreate the painting. And after five scenes that represent dawn to late night, in the final Scene 6, we finally reach a time that does not exist.

The flow of time in ‘Landscape’, as referred to by the artist herself, is a journey by the girls in search of their own selves and also a metaphor for the lives of people through an unknown world. These girls, as in ‘Still Life’ and ‘Landscape’, while sharing the questions about painting and our existence, will eventually return to the ‘portrait’ of all of us – each burdened with their own dilemma yet still carrying on.
3차원으로 구현된 회화적 풍경:
써니킴<풍경> 5.23-25 인천아트플랫폼

백남준아트센터 학예팀장, 안경화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의 만대루. 낙동강의 절경을 음미할 수 있는 장소이자 풀벌레와 바람 소리도 설계됐다고 일컬어지는 누각. 허공에 세워진 누각, 더 정확히 말해서 만대루를 구성하는 목조 기둥들은 낙동강과 병산, 나무와 바위와 함께 수려한 풍경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기둥 사이로 시야를 움직여 가며 산과 강을 바라볼때 이 기둥들은 일종의 프레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풍경의 일원이 된 기둥은 풍경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을 볼 수 없도록 시각적으로 방해하거나, 오히려 그것들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병산서원이라는 인공의 건축물과 자연이 결합된 풍경은 써니킴의 퍼포먼스 <풍경>의 무대로 극장 안에서 재구축되었다. 풍경을 담은 영상이 투사되는 무대 안쪽의 스크린이 원경이라면, 각기 다른 높이로 만들어진 관객석은 만대루처럼 감상을 위한 자리인 동시에 무대의 근경을 담당한다. 원경과 근경 사이에는 나무와 연못, 기둥들이 위치하며, 무대 위를 오가는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풍경은 완성된다. 흰 셔츠와 검정 스커트를 단정하게 입은 3명의 배우들은 써니킴의 회화에 등장하는 교복 입은 소녀들을 쉽게 연상시킨다.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퍼포먼스에서 모든 장면(풍경)과 배우들의 연기는 작가가 회화를 통해 이미 구현한 장면을 삼차원의 공간에 재구성하고자 철저하게 연출되었다. 예를 들어 일몰과 황혼의 시간을 주제로 한 네번째 장은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의 풍경을 그린 회화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영상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무대를 거니는 소녀들은 회화 속의 인물들이 취했던 포즈를 재연하고, 상상의 풍경을 소재로 한 옛 시를 한 구절씩 주고받듯이 낭독한다. 스크린을 향해 걸어가는 소녀들의 뒷모습에는 오후 무렵의 강한 햇빛이 비치기도 한다. 스크린에서 보이는 황혼의 풍경, 배우들이 풍경을 묘사한 시를 읽으면서 말이 만들어 내는 풍경, 그리고 영상과 배우를 비롯한 무대위의 모든 요소들이 빚어내는 풍경. 이처럼 써니킴의 퍼포먼스에는 겹겹의 풍경들이 공존한다.

작가는 그동안 회화를 통해 허구의 시공간과 이 공간 속을 부유하는 인물들로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이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다. 공간과 인물, 이미지와 텍스트, 소리와 빛이 조화를 이루는 퍼포먼스 <풍경>은 평면에 존재했던 연극성을 실제의 공간으로 이동시키며 회화의 본질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논의하려는 실험이다. 회화적 소재를 평면으로부터 공간으로 이끌어 낸 방식은 2012년 문화역서울284에서 발표한 퍼포먼스 <정물>에서도 시도된 적이 있다. <정물>에서 그림의 재연을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며 텍스트를 읽던 소녀들은 <풍경>에서 다시 한번 그림의 재연을 위해 연기한다. 또한 새벽부터 밤이 되는 시간을 상징하는 다섯개의 장면을 거쳐, 마지막 여섯 번째 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도달한다.

<풍경>에서 시간의 흐름은 작가의 언급처럼 소녀들이 자아를 찾아 가는 여정이자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미지의 세계를 살아 나가야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 소녀들은 <정물>과 <풍경>에서처럼 회화와 삶의 문제를 공유하는 한편, 여전히 각자의 문제를 짊어지고 가는 우리 모두의 ‘초상’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Second Thought
Yunkyoung Kim

It always felt as if something was missing whenever I came across any comments of her works. For a long time now, her works had been labeled to only depict 1.5 generation immigrants, school girls and school uniforms. It seemed to me that such labeling restricted or reduced the artist’s original intent or that of the critics interpreting her work. The time Sunny Kim began introducing her work in Korea was during a period when the gale of late post-modernism and a massive inflow of discourse tended to confine the interpretation of the artist and their work into a standardized framework. As the audience, now with a greater power than ever, tailored and labeled artists, Sunny Kim’s works were also assigned their place. Ironically, that assignment has now become the keyword in theoretically defining the context of her works.

The interesting thing is that despite such misunderstanding and misreading, most of the images and symbols that persisted throughout Sunny Kim’s works did not originate from her actual or direct experiences and memories, similar to the viewers experiencing her works indirectly through a preexisting framework. Those images and symbols, although pursued by the artist, were eventually unfulfilled and thwarted. They, because they did not exist, could not be touched nor obtained. They are something perfect which only exists in a place that can never be reached. They had been sealed within her everlasting anticipation or maybe in her memories, in the form of the most vivid and perfect images. Could this be the reason why Sunny Kim’s characters and landscapes felt like still life displayed in a showcase? It is this context, her works, having smooth and neat finishes, perceived to be lacking the artist’s warmth or breath, or felt as subjects detached in distance, can be understood. This idiosyncrasy also continued through her 2006 exhibition.

In her exhibition ‘Second Thought’, the first since her last show in 2010 – when she introduced works where people and landscape coexisted – she uses a different brushstroke technique and ‘Line’ (2013) stands out among her new works. For Sunny Kim, ‘Line’ plays an important role in representing an opportunity for the first time in her career to finally remove that transparent, objective wall that had always stood in her way. It was her first attempt in expressing her emotions being faced with the actual landscape itself, from the memories of feelings acknowledged within herself. This, however, does not mean that such a change is the theme of the exhibition. Rather, as the title suggests, the exhibition openly shows, in a somewhat distracted manner, the artist’s thoughts and concerns which continue to occupy her.

Landscape without people. Carefully displayed objects. iPhone snapshots. Yet, this exhibition cannot be simply criticized as being ‘distracted’ due to the artist’s willingness to expose her state of mind. This attitude materializes in ‘Line’. This change, perhaps caused by the humbleness and loneliness felt when facing Tumen River – a place that only existed in her imagination as a symbol of strength – by the artist who had always dreamt of the ‘perfect image’, is the reason that makes me eagerly anticipate her future work.
써니 킴: Second Thought
김윤경 독립 큐레이터

써니 킴의 작업을 볼 때마다, 그의 작업에 관한 언급들을 접할 때마다 적지 않은 아쉬움이 느껴지곤 했다. 꽤나 오랫동안 그의 작업은 이민 1.5세대, 여학생과 교복 등 특정한 꼬리표를 단 채 서술되었고, 이런 방식이 작품을 생산해내는 작가와 이를 유의미하게 읽어내려는 평자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써니 킴의 작업이 발생시키는 의미의 폭을 제한하고 축소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써니 킴이 한국에서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뒤늦은 포스트모던의 광풍과 물밀듯이 유입된 수많은 담론이 작가와 작품을 규격화된 해석의 틀 속에 가두어버리던 그런 시기였다. 막강해진 힘을 갖게 된 독자들이 재단하는대로, 써니 킴의 작업 역시 자신의 좌표를 부여받았고, 이 좌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업을 둘러싼 맥락을 이론적으로 규정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재밌는 사실은, 지루하고 끈질긴 오해와 오독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업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대부분의 이미지와 상징들이 실상 그 어느 것 하나 작가가 실제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기억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독자들이 직접적이라기보다는 기존의 틀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작업을 경험하던 방식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 이미지와 상징들은 모두 작가가 기대했으나 결국에는 좌절되고 어긋나버린, 그래서 존재하지 않기에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었던 어떤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완벽한 어떤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영원한 기대 속에, 혹은 만들어진 기억 속에 가장 생생하고 완벽한 이미지의 형태로 봉인되어 있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써니 킴의 인물과 풍경은 진공의 진열장 속에 놓인 정물과도 같이 느껴졌던 것일까? 매끈하고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작가의 체온도, 숨결도 느껴지지 않는, 저만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대상으로 이해되었던 써니 킴의 작업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고, 이 특징은 2006년의 개인전에도 이어진다.

다소 변화된 필치로 인물과 풍경이 공존하는 작업들을 선보였던 2010년의 개인전 이후 3년여 만에 마련한 이번 개인전 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작업은 (2013)이다. 이 작업은 늘 자신 앞을 가로막고 있던 투명하고 냉정한 벽을 거두어내고 실제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그 실제 풍경과 마주한 자신을,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그 인식의 기억을 더듬어 그려내기 시작한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써니 킴에게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이번 전시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시 자체는 오히려 그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작가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생각과 고민을 그대로, 다소 산만하게 펼쳐 보여준다.

인물이 사라진 풍경과 세심하게 진열된 정물, 그리고 아이폰으로 촬영한 스냅사진까지. 그런데, 이 전시를 단순히 산만한 전시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산만함을 기꺼이 드러낸 작가의 태도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바로 을 통해 체현된다. 오랫동안 상상 속에서 강력한 상징으로만 존재하던 두만강과 조우한 현실이 전해준 초라하고 쓸쓸한 감정이 ‘완벽한 이미지’를 꿈꿔온 작가에게 일으킨 변화. 이것이 써니킴의 다음 작업을 벌써부터 기대하게 만든다.
ROLLlNG FOG:
Memories of things which never were
Eunju Lee, 2010

My first encounter with Sunny Kim’s “Girls in Uniform” series was from her 2001 Gallery Sagan exhibition. At the time, her work, which mostly originated from documentary sources suggestive of standardized types, was transformed to deliver an artificial formality akin to graphic images. There was a certain intentional barrier that evoked a sense of absence and a feeling of cold detachment, and the fact that one could not find any youthful energy nor movement in the uniformed smiling girls made the paintings different. The psychological blocking and absence shaped by the consciously-removed ambiance paradoxically created a unique aura. Her solo exhibition at the Ilmin Museum of Art continued along the same path. Ornate and intricately painted traditional embroidery motifs were also used to signify the lack of life and movement. The school girls’ youthful energy is locked within the distance of time, even more distant than old photographs one may find in a museum. The perfectly elaborated and flawless finish of the paintings rendered them more unreal, and this intentional effect of removal operated as a psychological device.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Kim explains such manipulation to be her attempt toward a “perfect image.”

When discussing Kim’s work, one cannot overlook the fact that she is a 1.5 generation Korean- American. As she admits, the abrupt break and change following her move, and the attitudes formed therein, have been important foundations for her work. The “Girls in Uniform” series shown at the Gallery Sagan exhibition may have first created the impression that her interest was in socio-cultural conditions such as the systematic suppressions found in Korean society, perhaps due to the clearly systematic clichés embodied within the motif of uniforms. However, her works using the theme of traditional embroidery exhibited at the Ilmin Museum showed that the artist’s interest was not in socio-political themes such as the systematic suppression of the individual, but, rather, in the concept of standard “rules” under certain conditions. “Rules” can have a suppressive and negative connotation, but, can also be a very consciously creative act of controlling and organizing a subject in a specific manner. In Kim’s work, these rules become a mechanism for consciously manipulating the images in her paintings toward her targeted “perfect image.” This aspiration toward the “perfect image” is an important motivation driving Kim’s work. For Kim, who left Korea when students were still required to wear uniforms, the appearance of a high school girl in uniform is always a prototype of this “perfect image.” This is likely due to the neatness of the uniform, the beauty regulated by rules, and the social position accurately and reasonably thus imparted on the wearer. In an environment where rules were suddenly lost, and in a situation where balance had to be independently found, uniforms could have been for Kim an effective ideal of a youth where safe order was guaranteed. In this vein, the uniforms in Kim’s work are not a means for suppressing female students, but rather can be seen as a means for establishing a fixed and clear identity.

Uniforms and embroidery have served as vehicles through which to recreate memories, but those which Kim could never possess, since they were never realized in and abruptly disappeared from her own life. Kim’s work, which seeks to revive such objects which were omitted or absent, may be perceived as an irrational nostalgia for memories which never existed in the first place. Thus, her works are fundamentally based on the impossible attempt to hold what cannot be held on to. The images in her paintings are also ultimately only substitutes for what cannot be real, and are fabricated visions. Despite being constructed, they still concern a reality which is continuously sought for balance within the artist’s unconscious, and somehow connects and links within the artist’s internal world. Even if these images never actually existed, they have a psychologically compensating function in Kim’s work and acquire a complete reality within her paintings. This is also why Kim speaks of a “perfect image” rather than “perfection.” Kim’s paintings can be seen as works which “perfectly” recreate the fragments of her lost memories, within the rules of the painting surface which she can control as the artist. This is a conceptual world which can never meet reality, a pure painted utopia. The weightless space and ethereal nature represented in her recent works originated from the above.

Recently, an important transformation has been occurring in Kim’s work. The works in her Gallery Hyundai 16 Bungee show evolved from her “Girls in Uniform” series, but mainly use objective sources such as movies, magazines and newspapers, rather than personal photographs. The biggest change is that the element of movement has been incorporated in her work. If her previous works conveyed a stiff feeling through permanently fixed poses of uniformed girls or embroidery patterns, the figures in her recent works – taken from movies or magazines – appear to have a cautious vitality contained within a certain time and space. While this movement is still very subtle, and it remains uncertain whether the figures are stationary or moving, what is clear is that they have a greater spatial reality than the memorial-like arrangements of her previous works. Uniformed figures still appear in Kim’s images. Unrelated to the narrative of the original source, they play roles within the time and space depicted by her paintings. They exist, but their actions or locations are unclear – with no obvious clues of their situation. Their faces are not drawn, and they mostly appear from the back or as partial views. Viewing Kim’s new paintings, I was reminded of the Japanese movie “Wonderful Life”, which is composed of the desired last memories of various deceased characters immediately before they move on after their death, and create in the viewer an illusory sensation, of not being sure if the characters are alive or dead or where they are. I felt a similar sensation of a blurred middle ground from Kim’s work.

For instance, the uniformed students in Sunset are looking at the landscape in front of them, but they also look somehow melancholy or perhaps even singing together, or nervous about their future. Such as images projected on a screen, they look likely to disappear without a trace once the projector is turned off. The entire space of the painting seems airborne through a transparent layered effect, and their existence looks as light as an apparition. Works like Drive or Balloon are transformed newspaper images. In Drive, the procession of military trucks traversing through the faint light with their headlamps on looks unsettled and endangered, as if suddenly forced into a secret move toward an unknown destination. The parachute in Balloon appears to be moving very slowly within a space where time has stopped, with no clear destination. From the building in Spring, which seems somehow awkward, such as a sudden apparition appearing from nowhere within some quiet mountains, one is reminded of the psychological experience of mysterious objects which suddenly appear in a strange shape after being buried in everyday life. Despite never being seen, they provide a feeling of déjà-vu or faint recollection. This is likely due to the curious nostalgia created in the viewer by the emotions imparted in the artificial memories created by Kim. This emotional effect is a new characteristic of Kim’s recent work. If her past works had a strong intended sense of a closed space, her recent works seem to have a slightly open window for discourse where psychological experience can be shared.

Kim explains that the uniformed girls and her other images are self-portraits in some sense. Much like a film director, she takes characters and backgrounds from various sources, removes their original context, and transforms them into the protagonist and background existing only for her paintings. This compilation method of creating her own storyline by editing various sources fits well with her own multicultural interests. This attitude, which must have been formed from staking out her own space within the disparate Korean and American cultural frameworks, is still an important part of Kim’s working process. To her, the original source is irrelevant, and the only significance lies in how they ultimately contribute to her “perfect image.” By moving between such sources, Kim is pursuing the psychological space she has lost but wishes to recover. Even if impossible, her work, which seeks to connect broken links like a mobius strip, creates a certain empathy. The vague feeling of déjà-vu generated by Kim’s work may be due to our sense of nostalgia for things lost. However, this lost world does not intrude into reality, remains forever on the other side, but still returns faithfully to us as visions.

Kim has recently started a new portrait series of uniformed women well beyond their teenage years. She is painting these women in idealized poses, in the manner of icons, such as saints, and she states that they are idealized images of uniformed teenage years which never existed, while also representing a mourning for years already passed. This portrait series is Kim’s first attempt using actual models, rather than indirect sources such as photographs and movie stills. In placing her models in uniforms and specific poses, Kim is still acting as the director, and her focus on the desired image rather than the subject matter seems a clear link with her previous work. However, painting live figures will involve the expression of a different reality, clearly distinct from her past efforts. I am anxious to see how these portraits fuse memory and reality to evolve into yet another “self-portrait.”
ROLLlNG FOG: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기억
이은주, 2010

써니 킴의 작업을 처음 본 것은 교복 입은 소녀들을 그린 연작들이 실린 사간갤러리의 전시도록에서였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과거의 사진첩과 같은 다큐멘터리적 출처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정형화된 타입(type)으로 제시되면서 그래픽과도 가까운 형식성이 드러나고 있었다. 거기에는 껍데기만 남기고 내용은 떠난 듯한 부재의 느낌과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차단한 것과 같은 냉정한 거리감이 있었는데, 여학생들이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활기와 움직임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점이 독특했다. 아우라를 인위적으로 없애버린 듯한 부재와 차단의 효과가 역설적으로 특수한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에서도 그 효과는 여전했다. 교복 입은 소녀들과 더불어 사용된 전통적인 십장생 문양들은 정교하게 구현된 회화 표면 위에서 영구히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청춘의 상징인 여고생의 싱싱한 육체와 활기는 역사기념관의 기록사진 속보다도 한층 더 멀리 있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박제된 시간 속에 가두어진 듯 했다. 육체적 흔적들이 기화된 듯 텅 빈 껍데기만이 남겨져 있고 회화적 모티프들은 지시할 내용들이 지워진 앓은 표면의 기호와 표식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었다. 이 기호들의 세계는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진 매끄럽고 흠 없는 회화적 완성도로 인해서 더욱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다분히 의도적인 이 소격효과 속에는 어떤 심리적 기저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 스스로 이러한 작업이 ‘완벽한 이미지 (perfect image)’를 구현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용을 삭제하고 표면만이 남아있는 듯한 그 특정한 효과가 어떠한 점에서 써니 킴에게 ‘완벽한 이미지’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써니 킴의 작업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따라오는 꼬리표는 ‘재미교포 1.5세’라는 것이다. 작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이주에 따른 갑작스런 단절과 변화, 그 안에서 형성된 태도는 써니 킴의 작업을 이루는 중요한 근간이 되어왔다. 사간갤러리의 개인전에서 보여진 교복을 입은 소녀들 시리즈는 얼핏 그의 관심이 교포로서 바라본 한국사회의 제도적인 억압과도 같은 사회문화적 조건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교복이라는 소재가 내포하는 명백하게 제도적인 클리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민미술관에의 개인전에서 전시된 전통 자수문양을 주제로 한 작업들은 작가의 시선이 개인을 억압하는 특정한 제도적 틀과도 같은 정치사회적인 차원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 속에서의 일정한 ‘규율(rule)’이라는 개념 자체에 보다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규율’이라는 것은 억압적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어떠한 대상을 통제하여 특정한 형태로 조직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식적인 창조행위와 관련되기도 한다. 써니 킴의 작업에서 이러한 규율은 그림 속 이미지들을 스스로 조작하여 그가 지향하는 ‘완벽한 이미지’에 이르게 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이 ‘완벽한 이미지’에 대한 지향은 써니 킴의 작업을 추진시키는 중요한 동기이다. 교복 자율화가 되기 이전 한국을 떠난 그에게 있어 교복을 입은 여고생의 모습은 언제나 이런 ‘완벽한 이미지’의 전형으로 인식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교복이 주는 단정함, 규율 속에서의 통제된 아름다움, 그리고 교복이 그것을 입은 대상에 정확하고도 합당하게 부여해주는 사회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규율이 상실된 환경, 스스로 균형을 찾아내야만 했던 상황 속에서, 교복은 써니 킴에게 안전한 질서가 보장된 청소년기에 대한 효과적 표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써니 킴의 작업에 나타나는 교복은 여학생들을 억압하는 수단이 아니라, 확고하고 명백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복과 자수문양은 써니 킴의 삶 속에서 현실화되지 못한 채 갑자기 사라져버렸던 것. 그렇기 때문에 영구히 가질 수 없는 기억들을 재현하는 소재가 되어왔다. 이처럼 누락된 것들, 텅 빈 진공 상태로 남아있던 것들을 복귀시키려는 써니 킴의 작업은 존재하지 않는 기억들에 대한 부조리한 향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의 작업은 잡힐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전제로 한다. 그가 만들어내는 회화 속 이미지도 결국 완전한 현실이 될 수 없는 대체물이자 가짜(fake) 시공간들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공의 세계이지만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균형을 위하여 끊임없이 요청되는 리얼리티와 관련되며, 내적 세계와 어디에선가 연결되고 접속되고 있는 세계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현실의 삶 속에서 온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을지언정 써니 킴의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심리적 보상기능을 담보하면서 회화평면 안에서만큼은 완전한 리얼리티를 얻는다. 써니 킴이 ‘완벽함(perfection)’ 이 아니라 ‘완벽한 이미지(perfect image)’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써니 킴의 회화는 상실된 세계의 파편들을 그가 작가로서 통제할 수 있는 회화평면의 형식적 규율 속에서 그야말로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과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관념의 세계이자 순수한 회화적 유토피아이다. 최근 작업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무중력한 공간감, 공기나 유령처럼 실체감이 없는 특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현된 것이라 생각된다.

최근 써니 킴의 작업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갤러리현대 16번지의 이번 개인전 작품들은 교복 입은 여학생 연작에서 발전된 것들이지만, 개인의 사진첩이 아니라 영화나 잡지, 신문과 같은 객관적 출처를 주로 활용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작업 속에 움직임의 요소가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작업에서 교복 입은 여학생이나 자수문양이 영구히 정지된 부동의 포즈를 취한 채 박제된 느낌을 전하고 있었다면, 영화나 잡지에서 인용한 최근작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떠한 시공간 속에서 조심스럽게 살아 있는 듯하다 그 움직임은 여전히 매우 미약하여 인물들이 서 있는 듯 움직이는 듯 모호하지만, 기념관 자료와도 같이 평면적으로 구성되었던 과거의 작업들 보다 공간적인 리얼리티를 얻고 있음은 분명하다. 써니 킴이 차용한 이미지들 속에는 여전히 교복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본래 출처 속의 내러티브와는 무관하게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시공간을 위한 회화 속 배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살아있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호하며,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유추할 수 있는 명확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다. 얼굴은 그려지지 않고 주로 뒷모습이나 일부가 잘려진 작업 모습으로 등장한다. 작업 중인 이 새로운 연작들을 처음 보았을 때 영화 ‘원더풀 라이프(Wonderful Life)’가 떠올랐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주인공들이 죽음 후의 공간으로 이동하기 전 이 생에서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로 구성된 이 영화 속에는 주인공들이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환영과도 같은 느낌이 줄곧 있었는데, 이처럼 모호한 중간지대와 같은 분위기가 써니 킴의 작업에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Sunset>과 같은 작업에서 교복 입은 학생들은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딘지 슬퍼 보이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며, 그들 앞에 놓인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은 마치 스크린 위에 투사된 영상처럼 불이 꺼지면 곧바로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희뿌옇게 처리된 레이어 효과들로 인해서 회화 속 공간 전체가 공중에 떠 있는 듯하고, 이들의 존재는 정령처럼 가벼워 보인다. <Drive>나 <Balloon> 같은 작품은 보도사진의 일부를 변형시킨 것이다. <Drive>에서 라이트를 켜고 희미한 빛 속을 가로지르는 군용트럭들의 행렬은 어디를 가는지 모른 채 떠나야하는 갑작스럽고 비밀스러운 이주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Balloon>에서의 낙하산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시간이 정지된 공간 속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Spring>에서 적막한 산 속에서 갑자기 출현한 듯 어딘지 어색한 건물의 모습에서는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불쑥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 정체불명의 것들에 대한 심리적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실상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한번은 본 것 같기도 한, 아주 오랜 기억들을 떠올릴 때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써니 킴이 만들어낸 가상의 기억들이 보는 이에게 기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이입 효과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입 효과는 써니 킴의 최근작에서 새롭게 성취된 특질이다. 지난 작업들에 의도적인 차단의 효과가 강했다면, 최근작들에서는 심리적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소통의 창문이 슬쩍 열려 있는 듯하다.

써니 킴은 인터뷰 중에서 교복을 입은 소녀, 영화 속 장면에서 발췌한 이미지들 모두가 일종의 자화상과도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치 연출자와도 같이 여러 출처들의 인물과 풍경을 가져와서 출처 본래의 맥락을 삭제하고, 자신만의 회화 속 시공간의 주인공과 배경으로 변형시킨다. 여러 출처들을 편집함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컴필레이션 방식은 다문화적 병치를 즐기는 그의 평소 성향과도 잘 통한다. 한국과 미국이라는 상이한 문화적 틀 속에서 자신의 공간을 확보해나가면서 형성되었을 이러한 태도는 현재까지 써니 킴의 중요한 작업 방식이 되고 있다. 이 출처들의 원천이 무엇인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통해 결과적으로 어떠한 그만의 ‘완벽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이러한 문화적 출처들 사이를 배회하면서, 써니 킴은 그가 잃어버렸지만 복구하고 싶은 심리적 공간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구조 속에서 어딘가 끊어진 차원의 깃들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그의 작업은 완결이 불가능한 시도일지라도 모종의 공감대를 느끼게 한다. 써니 킴의 작업에서 어딘지 본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누구나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어떤 것들에 대한 버릴 수 없는 향수를 가진 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잃어버린 그 세계는 현실에 침윤되지 않은 채 피안의 세계로 영원히 남아 우리에게 끝없는 환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써니 킴은 최근 초상화 시리즈를 새롭게 시작하였다. 이미 청소년기를 지나 버린 여성이 교복을 입은 모습을 그린 작업이다. 그는 이 여성들을 마치 성인(Saint)들의 초상과도 같이 이상화된 자세로 그리고자 했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았던 교복 입은 청소년기에 대한 이상화이자 이미 사라진 시절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초상화 시리즈는 사진이나 영화장면 같은 간접적 출처를 사용하지 않고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한 첫 시도이다. 인물들에게 교복을 입히고 특정한 포즈를 취하게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연출자적 태도를 견지하며,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전 작업들의 맥락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살아있는 인물을 그린다는 점에서 분명히 전 작업들과 다른 현실감의 표현이라는 과제를 안게 될 것이다. 이 초상화 연작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기억과 현실을 접합시켜나가면서 또 다른 ‘자화상’으로 발전되어갈지, 이후의 전시를 기대하면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자 한다.
교복 입은 소년 소녀가 들려 주는 이야기

개념적 회화, 회화적 개념미술 이 두 가지 미술의 형식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써니 킴의 작품 세계를 더듬다 보면 자연히 그 차이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교복 입은 소녀에 대한 향수를 갖고 사는 ‘다 자라버린’ 소녀의 그림. 이러한 써니 킴의 초기 작업은 회화라는 매체를 사용한 개념미술의 느낌이 강했다.

교복 입은 소녀를 그리는 이유

써니 킴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작가는 1.5세대 재미교포라는 성장 배경이 있다. 써니 킴이 미국으로 이민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작가는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계속 교복을 입어 왔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까운 미래 모습을 교복을 입은 ‘단정한 여고생 언니’로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이민’ 이라는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는 어린 소녀에게 적응을 강요했고, 물론 교복 입은 여고생의 미래도 빼앗아 버렸다. 당연히 찾아올 줄 알았던 미래의 초상을 경험하지 못했던 트라우마 때문에 써니 킴의 유년기는 언제나 모호하고 누락된 시공간으로 남아 있다. 써니 킴은 초기 작업에서 이런 모호함과 불안정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오래된 졸업 앨범에서 가져왔을 법한 여고생의 소풍이나 수학여행 사진 이미지들을 재조합해 외적 형태만 몽타주한 후 캔버스에 옮겨 그렸다. 치밀하게 계산한 도안을 그래픽디자인 이미지나 판화로 오인될 만큼 평면적인 느낌으로 그렸다.

또한 <Garden> (1998), <Underworld> (1999) 등 1990년대 후반의 작업에서 소녀들의 배경으로 이따금씩 등장했던 전통 자수 배경은 이후 2006년 일민미술관에서 개최한 개인전 <Perfectly Natural>에서 동양과 서양이 합체된 ‘완전한 풍경’으로 발전한다. 제목부터 아이러니해 보이는 이 전시에서 선보였던 <수양버들> <바위와 구름> <Flying Birds Lavender> (2005) 등은 전통 자수를 모티프로 삼고 있지만 교복 입은 소녀들을 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껍데기의 공허함만 좇을 뿐,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그려냄으로써 심리적 보상을 받는 공간에 다름 아니다. 의도적인 자용과 배제에 근간을 둔 작업 방식은 여전하다. ‘완벽한 자연스러움’ 이라는 이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와 이를 표현하는 이성적이고도 다분히 의식적인 창작방식은 명료한 의미 전달을 통해 주제를 강조하는 개념 미술의 모습과 상당 부분 닮아 있었다.

일민미술관 개인전 개최 이후 한동안 써니 킴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었다. “2년간 정말 힘들었고, 그 후에는 정돈이 된 것 같아요. 일민미술관 개인전 이후 이전 작업을 그만 두고 옛날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뒤집어서 생각하면서 태도와 작업이 변하기 시작했죠. 또한 과거에 비해 조금 더 자유롭고 관대해진 면이 있어서 그림 그리기가 훨씬 편해졌어요.”

그로부터 3년 여의 시간이 지난 최근작은 이전의 그림과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머리가 아닌 손으로 그리고 있음이 확연하다. 그간 써니 킴은 그림의 매력에 푹 빠져 ‘회화’라는 고전적인 미술의 형식에 천착하는 시간을 보낸 듯하다. 작가 역시 스스로 본인의 최근 작업이 ‘회화적’으로 변모했다고 고백한다. 가장 큰 변화는 그림의 레이어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한 겹으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그래픽 이미지 같은 질감이 아니라, 물감을 여러 겹 덧바름으로써 작은 면적에서도 여러 가지 색깔이 중첩돼 보인다. 그 결과 몽상적이고 아련한 분위기로, 마치 맛과 냄새가 나는 듯한 그림이 되었다.

레이어의 증가는 색감뿐만 아니라 디테일을 살리며 대상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캔버스에 그린 것은 정지된 순간이지만, 그려진 대상에서는 약간의 미동이 포착된다. 과거 작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브제의 외곽선에 주목하게 했다면, 최근작에서는 캔버스 화면 전체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이미지의 내러티브를 강화시킨다. 화면은 오브제뿐만 아니라 공간감과 빛에 의해 완성되고, 아울러 관객의 시점을 의식하면서 거리감을 주요 구성 요소로 가져왔다. 가령 <Window>에서는 창 밖을 바라보는 두 소년의 양쪽에 흰 벽이 놓여 있는데,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소년들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기분을 주기도 하고, 건너방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열린 내러티브, 새로운 카논을 제시하다.

잃어버린 기억을 현재화시키는 것, 혹은 상상의 미래를 끄집어내어 현재에서 해석하기 위해 그가 찾은 연구방법은 영화와 소설을 보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는 영화 속 장면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고, 영화와 소설 특유의 서사적 구조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써니 킴의 회화에서 구체적인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움직이고 있는 이미지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호기심이 생긴다. “대상보다는 현재 그 대상이 처한 상황 자체를 그리고 싶어요. 이야기가 한참 전개되고 있는 중간을 잠깐 멈춰 놓은 듯한 느낌 말이에요. 움직임을 살려서 이 이미지의 전은 뭘까, 후는 뭘까, 나는 어디에 있나…. 그 주위를 생각하게 되는 거죠.”

또 다른 차이점은 과거 소녀들과 달리 소년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인물은 정면이 아니라 뒷모습만 그리거나 머리 아래로만 그린 옆모습이다. 표정이 없어 과거 소녀들의 표정에서 목격되던 인위적 가식적 느낌은 없지만, 그들의 동작에서 여전히 어색한 느낌이 의도적으로 들어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소년들은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유니폼(교복)을 입고 있다. 소년들의 복식은 소녀들이 입었던 1960년대의 교복이라기보다는 흰 셔츠에 검정색 반바지에 멜빵을 맨, ‘단정한 차림’으로 보인다. 최근작에서 소년들의 외양을 보고나니, 과거의 소녀들도 달리 보인다. 등장인물이 입은 교복은 물론 그 동안 써니 킴의 작품에서 충분히 이야기됐던 근대사, 집단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밖에 다른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상에게 같은 옷을 입힘으로써 작가의 비감정적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고, 어쩌면 작가의 미적 취향이 반영된 회화적 장치일 수도 있겠다. 유니폼을 입은 대상들은 하나 같이 꽤 균형 잡힌 일정한 체형이다. 여기서 오는 일련의 경직성은 동시대의 새로운 회화적 ‘카논’(Canon)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술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회화라는 형식에 있어서 ‘화가’가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개념성 실험성으로 점철된 동시대 미술에서 회화는 어떻게 수용, 이해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동시대 미술에서 그림이 가지는 힘은 유효하다. 단, 과거의 회화와 달리 훨씬 내밀한 사유와 선택적 장치가 필수 조건으로 마련돼야 한다. 이 난제 때문에 작가는 그간 꽤 오랜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작업이 지금처럼 더욱 회화적으로 변모하기까지 써니 킴은 그림을 그릴 때 갖는 ‘태도의 변화’ 가 가장 컸다고 말한다. 그의 그림은 열린 내러티브와 새로운 카논을 통해 ‘회화적 개념미술’ 에서 ‘개념적 회화’로 한걸음 또 나아가고 있다.

호경윤 Art in Culture, February 2010 pp. 146-149
Interview by Jang Un Kim

JK: I would like to ask about the recent development of your work from your past images of girls in uniform, which left a strong impression on us. Which aspect of your work should we focus on, from your past concerns moving onto a new area of interest?

SK: The idea of a uniform is based on my childhood in Korea. It investigates the uniform as an image and ideology in the languages of culture and politics. “Girls in Uniform” comprises idealized images of youth in Korea which are embedded in my memory as something which represents my background.

Along with the uniform, I introduced Korean traditional embroidery into my work. Beneath the veneer of a clean and controlled shell, they contain both the aspects of repression and restriction of one’s expressions of individuality.

My recent works digest these images and concentrate on removing and rearranging my previous main subjects. This process resembles my formal approach to the work.

For this show, I tried excising most of my images, including uniform and symbolic images most commonly used in embroidery, because I felt that my work was getting a bit too idealistic, or rather, ethereal. As a natural result, the background in the form of a simple landscape appeared. Here, the idea of “Landscape” escapes the metaphysical meaning of the word but is created by elimination and recomposition, through the use of embroidery as a main source.

Through this process, by removing most of the images, a new idea of space is born, under the subject of “landscape”. With traditional embroidery or (documented) photographs, I change their innate personalities and, like collages, I position them as patterns. This process of eliminating and rearranging creates a very unnatural and fabricated landscape, and through this, I hoped to free myself from all of the historical meaning associated with these images.

JK: You often mention a “perfect image”. What does “perfect” suggest based on your social and cultural background?

SK: Growing up in two very different cultures, Korean and American, I always thought that they didn’t smoothly connect, that they were very much separate. I wanted to escape this duality by creating a perfect and ideal image, and that idea is the “perfect image”.
I questioned how these images, girls in uniform and traditional embroidery, would react if I combined and dissected them. By using these pre-existing images and by eliminating and recomposing them, the possibility of a new image exists.

JK: What is the importance of “borrowing” (as a method) in your idea of a “perfect image”?

SK: “Borrowing” is an inevitable and significant gesture for me. In my effort to create a “perfect image”, I feel that I need to use pre-existing Korean images with all their historical meaning and combine them with my own position and identity.

JK: You often state that the elements in your paintings are subject for study. Then, what is the purpose of this study?

SK: My work began with questioning my identity and my status as a 1.5 generation Korean-American. Under a similar vein, I am trying to create a new image through the images of “girls in uniform” which represents Korean modernization and then juxtaposing the uniform and traditional embroidery, and finally, into the landscape, which is a result of eliminating these images.

I am aware of the fact that these images stand within the political and ideological realm of Korean history and culture. I wanted to understand their historical predicament from my point of view, and as a result, wanted to avoid the specifics of politics of their fixed political identity or meaning. By understanding and grasping my identity as a Korean-American, I could finally free myself and hope for the return to the notion of my multi-cultural background. I think this is the purpose of my study and possibly, the realization of the “perfect image”.

JK: I once wrote about your previous body of work from a feminism and subaltern perspectives. What is your opinion on this?

SK: Girls in uniform and traditional embroidery are important images in understanding my identity. I cannot avoid the fact that they inherently embody feminine aspects; however, I cannot say that I use them from the same perspectives.
김장언과의 인터뷰

김장언: 교복입은 소녀들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써니킴의 최근 변화에 대해서 알고 싶다. 지난 작업과 이번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관객은 어떤 지점에 주목해야 하는가?

써니킴: 나에게 교복이라는 주제는 한국에서의 짧은 유년기의 기억을 토대로 한 한국의 이미지의 재해석이라 할수 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의 모습이 내 기억속에 가장 깊게 남아있는 한국의 이미지였다.

교복과 더불어 나중에 흥미를 가지게 된 전통자수는 외관상으로 보이는 깔끔함과 정갈함속에 자유로운 표현의 억압과 제재라는 의미에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이 두가지의 주제를 기본맥락으로 하여 부수적 이미지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기본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동일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의 미세한 변화를 언급하자면, 지금까지의 작업이 교복과 자수의 이미지들을 분해하고 재결합하는 작업의 결과물이었다면, 그 모든 요소들이 한 캔버스에 집결되는 과정에서 몽환적 성향이 강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교복입은 소녀와 배경을 제외한 자수의 주 이미지들의 사용을 절제하는 시도를 해보았다. 그 결과, 풍경이라는 주제가 스스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번 작업에서의 풍경이란 산 또는 시내의 형이상학적인 자연의 의미를 떠나, 자수라는 주제를 차용하여 그 하부 이미지의 재구성에서 생성된 결과물이라 볼수 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세부적 요소들을 제거해 나감으로써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 풍경이라는 주제 안에 생성되었다. 전통자수나 기록사진과 같은 자료들을 가지고 그 성질을 변용시키거나, 콜라주기법으로 패턴화시키고 그들을 배제, 조합하는 과정에서 가공된 풍경은 자연적이지 않은 자연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내가 차용해온 이미지들과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한국의 역사속에서의 의미에서 조금더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김장언: 당신은 완벽한 것에 대한 어떤 열망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당신의 사회 문화적 배경 속에서 완벽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써니킴: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개의 이질적 문화에서의 성장의 추억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경험으로 기억되어, 그 둘이 동일선상에서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이중성을 탈피해 완벽하고 이상적인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고 그 개념이 ‘Perfect Image’이다. 교복입은 소녀들과 자수작업을 결합, 또는 분해시켰을때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킬것인가. 또는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이미지로 가시화 될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이미지의 재구성을 시도해왔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완벽한 이미지란 전통자수나 기록사진과 같은 자료들을 가지고 그 이미지들을 콜라주 기법을 통해 패턴화시키고 그들을 조합하거나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 가능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번 작업에서 보여진 풍경이라는 주제 역시 완벽한 이미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면이라 생각한다.

김장언: ‘Perfect Image’ 의 개념에서 차용이라는 방법론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써니킴: 차용이란 나에게 필연적인 제스츄어이다. 나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한국적인 이미지들을 빌어와 이미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과 나의 입장(position)과 위상을 조합하여 새롭고 완벽한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한다.

김장언: 당신은 종종 자신의 회화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이 연구대상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연구의 목적은 무엇인가.

써니킴: 이민 1.5세대인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 나의 작업은 ‘교복입은 소녀’라는 한국식 근대화 속의 이미지를 거쳐, 교복과 전통자수와의 병치, 그리고 이번 전시의 주제인 교복과 자수의 주 이미지들을 배제한 결과물인 풍경까지, 같은 맥락아래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을 시도하고 있다. 내 작품 속의 이미지들이 내포하는 의미, 즉 그 이미지들이 한국역사와 문화속에서 갖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모르는 바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그들이 껴안고 있는 문제점을 나의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하려고 했으며, 결론적으로는 그것들의 고착된 정체성의 정치학에서 탈피하여 의미의 구체화 혹은 협소화를 피하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나는 내가 교육받아온 다문화적 개념(notion)으로의 귀환 –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느끼는 이중문화 속에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철저히 이해하고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질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귀환이며, 결국엔 한 인간 혹은 작가로서의 본질과 근원에 도달할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귀환 – 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의 연구의 목적이며 완벽한 이미지의 실현이 아닐까.

김장언: 나는 당신의 지난 작업들에 대해서 여성주의적이고 서벌턴(subaltern) 연구적인 관점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써니킴: 교복이나 자수의 주제는 나의 정체성의 이해에 있어 중요한 이미지이다. 이들이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여성적인 면을 부인할수는 없으나, 이 작업과정이 여성주의적이고 서벌턴 연구적인 관점에서 생성된 결과물이라고 할수는 없다.
과거와 기억이 재구성되는 방식

박정희식 개발 독재로 인해 만들어진 한국식 근대화를 관통하지 않았던 작가에게 그 시대적 경험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우리가 한 작가의 근대성 논의를 대면할 때, 그것이 시각 이미지화되어 우리 앞에 펼쳐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그와 함께 논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의 근대적 경험과 성찰은 어느 지점에서 발휘되고 있는 것일까.

써니 킴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미교포 1. 5세대로 10대 초반까지 한국에 살다가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교육받았다. 그리고 유럽의 가장 다문화적 도시로 일컬어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잠시 체류했으며, 결혼과 우연한 기회로 다시 한국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의 제한된 경제적 공간적 시간적 여건 때문에 다시 회화라는 고전적 장르에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그 대상을 교복 입은 여학생으로 정했다.

작가는 ‘재건’이라는 미명 아래 역동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한국의 1960년대에 태어났지만, 그러한 사회와 본격적으로 관계 맺기를 시작할 때쯤 한국을 떠났고, 사춘기라는 개인적 격변기를 뉴욕이라는 다인종 다문화 도시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는 거친 이민 생활을 꾸려가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코스모폴리탄으로서 성실하게 자라났다. 그런데 그는 – 지신의 여정은 매우 우연적이라고 이야기했지만 – 다시금 한국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빗겨갔던 그 한국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유토피아 속의 소녀들

조선시대 자수 문양 앞에 한 소녀가 있다. 이 소녀는 분명 써니 킴하면 떠올려지는 60, 70년대 교복 입은 여고생의 이미지는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녀의 치마 길이로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의 근대적 교육제도가 만들어낸 여고생의 이미지는 단정한 갈래머리 혹은 단발머리와 무릎 아래로 살짝 내려오는 검정색 스커트에 하얀색 세일러 칼라로 마무리된 블라우스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에서의 여고생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고생의 이미지다.

나풀거리는 블라우스와 짧은 치마의 소녀는 모란꽃 가지 위 노래하는 종달새를 바라보며 환한미소를 짓고 있거나(‘garden’, 1998), 십장생이 뛰노는 미지의 이상향속에서 부푼 가슴을 활짝 펴고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다(‘courtyard’, 2011). 그러나 소녀들의 환한 미소와 부푼 꿈이 근거하는 세계관은 앙반가 규수들이 익히고 배워야 했던 자수의 이상향이다. 전통적으로 구성된 여성성의 이미지와 새로운 꿈과 환상을 쫓는 여학생의 간극은 여성이 현실에서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미시적 갈등 구조만큼이나 복잡하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에게 ‘아씨적’ 세계관과 ‘여학생적’ 세계관의 조응과 충돌 그리고 화해를 매우 단선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써니 킴의 이러한 초현실주의적이지만, 단순한 이원 구도는 60,70년대 여학생들의 구체적인 일상을 탐구하면서 좀더 다층적인 의미의 구조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써니 킴은 자신의 어머니나 언니뻘 되는 여성들의 사진첩에서 청춘 기록물을 수집하고 그것을 재분류하고 재배치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확대하고 새로운 색을 입힌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소녀들의 추억을 담은 사진이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혹은 졸업앨범 촬영은 여학생들에 있어서, 결혼식만큼이나 완벽한 형태로 존재했으면 하는 어떤 이상적 시간과 공간이다. 현실이 비록 피곤하고 피폐할지라도 이런 행사만큼은 완벽하게 보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억하게 하는 사진을 위해서 소녀들은 자신만의, 그렇지만 매우 상투적인 포즈의 한 형식을 구성한다.

그녀들의 포즈는 구체적으로 사진기사의 강요에 의해서 구성된 것일 수도 있으며, 스스로 자신이 재현되고 싶은 이미지를 상정하고 완벽한 어떤 이상적 외연을 띤 자신의 모습일 수 도 있다. 그러나 모든 소녀들이 풍기는 그 몸동작의 형식은 그녀들의 본질과 현실이 배제된 허위적 육체의 형식이다 소녀들은 특별한 날에 어울릴 만한 특별한 대상으로 자신을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삭제해 버리고 그 특별한 날의 대상으로 완벽히 이미지화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완벽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완벽한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게 된다.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 2002)’의 두 소녀는 낙엽 진 늦가을 숲 속에서 소녀의 우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소곳이 서로의 어깨와 허리를 감싼 소녀들의 팔과 렌즈의 초점을 살짝 빗겨간 그녀들의 시선은 현실을 응시한다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꿈과 환상에 실현될 먼 미래를 향해있다. 그리고 그들의 만족감은 레즈비언적 에로티시즘이라기보다 오히려 깨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그들의 우정에 대한 기대와 흥분일 것이다. 그리고 ‘야호 소녀들, 2002’에서는 동산 위에서 발랄하게 야호를 외치는 3명의 명랑 소녀를 만난다. 그녀들의 야호는 아마도 메아리 칠 정도로 우렁차지는 않겠지만 낭랑한 반항을 일으킬 것이다.

이 소녀들의 클리세와도 같은 포즈들은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사진의 유령(spectrum)’을 떠올리게 한다. 바르트는 우리가 카메라 렌즈 앞에 놓일 때, 우리는 포즈를 구성함으로써 스스로 대상화된다고 했다. 대상화된 육체는 빛을 통해 다시 인화의 과정을 거쳐 살아나지만, 그것은 우리의 본질이 부재한 허위적이고 기만적인 육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밋밋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래서 인물사진은 빛에 의해서 다시금 우리 앞에 등장한 유령,죽은 자의 귀환이라는 것이다.

기억의 구조와 현재의 경험

그러나 써니 킴의 회화적 장치들은 우리가 바르트의 죽음의 그림자나 사진의 유령을 체험하는 것을 방해한다. 오히려 그의 미적 변형은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다시금 소생시키고 있다.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소녀들의 육체와 표정은 다시 살아나고 우리는 그 속에서 현재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된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동시대에 불러 들이는 그의 의도는 그렇다면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써니 킴은 자신이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한다고 하면서, 당시 삶의 의미 있는 요소를 상실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과거의 경험 속에서 구조화된 자신의 기억과 현재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문화의 충돌에 대한 공포와 상실감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시적인 사회적 위치는 매우 성공적이다. 이민생활에 적응한 자신과 현재 아내와 작가로서 삶을 영위하는 그의 위치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의 어머니와 언니들의 이미지들을 우리에게 호명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바르트식 사진의 유령을 호명함으로써 잊혀진 기억을 되살리고 자신의 뜻모를 상실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일까.

최근 그의 작업은 이러한 개인적 차원의 치유나 혹은 경험의 재생산에 국한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최근 그의 관심은 교복을 입은 소녀들에서 한국공공기관의 건축물들로 이동하고 있다. ‘분홍빛 건물(pink building)은 획일적인 한국 학교건축의 전형과 그 교정을 회화적 변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변형된 국제주의 건축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한국의 관공서 및 학교 건축물들은 효율적인 것에 대한 신화와 관공서가 가져야 하는 권위와 위계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공간 구조다. 정치적 성격과 사회구조가 변화.발전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과거 지배 이데올로기가 구성한 공간구성 원리는 아직도 잔인한 한국적 근대화의 경험과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에서 써니 킴의 관심과 이미지는 새롭게 재생산되고 있다.

그의 작업은 표현의 과정이라기보다 상실된 혹은 빗겨간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학습과 연구의 과정이다. 그래서 써니 킴을 만나러 기는 길은 바르트식 사진에 대한 야릇한 감상과 회화에 대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모호한 미학적 장치를 헤쳐 나가야 하는 숲길이다. 그리고 명백히 읽어낼 수 있는 문화 사회적 요소들과 우리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송곳과 같은 그 무엇을 체험할 수 있는 명확하지만 명확하지 않은 영역인 것이다.

김장언
Space, January 2004 pp.188-190
여성의 감수성과 재현의 정치학

소녀들은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어딘지 모르게 소녀들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써니킴의 작업에 대해서 ‘다시’ 써야 하는 내 처지에서 문제의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도출한 것임을 미리 밝혀야 겠다. 즉 이것은 써니킴의 작업에 대한 의문의 지점을 다시 발견하고 그의 작업이 제시하는 쟁점들을 동시대 문화현상에서 들추어보고자 하는 문제의 출발점이다. 나는 예전에 한 잡지에 기고한 그의 작업에 대한 글에서 그 이미지들이 만들어낼 문제의 지점과 의미에 대한 쟁점을 발견하기보다는 오히려 작업의 맥락을 찾아가는 것에 더욱 급급했다. 당시 내 글의 요지는 이랬다. ‘재건’ 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한국적 근대화의 경험을 거치지 않은 작가에게 그 시공간의 상징적 이미지인 ‘교복 입은 소녀들’ 의 의미는 무엇이며 다문화환경 내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 간 작가에게 과거의 기억과 체험을 다시금 구조화하는 것은 동시대 한국의 문화적 환경에서 어떤 문제를 도출해낼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글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도출하기보다 오히려 그 과정을 추적하는 것에 급급했던 듯하다. 그리고 나는 과정에 우리에게 익숙한 교복 입은 소녀들의 모습보다는 몇 작품없는 건축물 그림 <분홍빛 건물(Pink Building)>(2002)에 더 많은 의미를 개인적으로 부여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가 오히려 작가에게 소녀에 대한 재현의 정치학을 경유해서 한국적 근대화에 대한 내부자이면서 외부자인 자신의 위치 그리고 디아스포라적 경험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써니킴은 그러한 작업을 미뤄두고 오히려 당시 내가 언급한 아씨적 세계관 (자수에 의한 배경들)과 소녀적 감수성이 조응하는 작업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 기대와 추측은 잘못된 것일까.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해서 그 작업의 의미를 축소하지는 않지만 현재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써니킴의 작업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소녀들이 갖는 의미를 들추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위치하는 지점과 도달하지 못하는 지점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맥락은 단연 이민 1.5세대라 는 그의 정체성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위치 그리고 현재 우리가 서 있는 한국이라는 공간과 시간이 갖는 의미의 구조이다.

써니킴의 거의 모든 작업에 등장하는 교복 입은 소녀들 중 가장 상징적인 작업은 <교복 입은 소녀(Girl In Uniform)> 연작일 것이다. 2000년과 2001년 사이에 제작된 5점의 소녀 전신상은 사회가 문화적으로 맥락화한 ‘교복과 여학생’ 이라는 지점을 문제화한다. 이 시리즈 중 두번째 작업은 단정한 단발머리에 엄격한 몸가짐을 한 소녀가 무엇인가 불만에 가득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익광고의 한 장면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 소녀는 여학생들에게 훈육된 몸의 기억을 다시금 우리에서 돌려주면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듯하다. 즉 훈육이 체화되어 경직된 몸이 기억하는 부담감을 관객들에게 되돌리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외화시키고 있다.

이 작업은 교사나 부모가 강요하는 몸가짐을 거부함으로써 반항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과잉 표출함으로써 구조화된 기존 질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즉 사회가 의미화한 10대의 몸가짐을 과잉표출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불안감을 야기하고 그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 비스듬히 서 있는 다섯 번째 소녀는 자신의 존재를 선언적으로 드러낸다. 이 소녀는 옆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다리를 벌리고 당당히 서 있다. 비록 바람에 미간은 찌푸리고 있지만 앞으로 겪을 험난한 미래는 이 소녀에게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이 연작은 사회가 구조화한 여학생의 의미를 거부하는 자기 선언으로 보인다. 대상화한 타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주체로서 현재의 위치를 들추어내는 소녀들의 포즈는 작가가 여고생들의 다양한 기념 촬영 사진들 속에서 발견해 재배열하는 의미의 한 지점일 것이다. 여기에서 재현되는 소녀들은 현재 대중문화에서 재현하는 여학생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영화 <친구>에서부터 <말죽거리 잔혹사> 혹은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절대 순수의 이상향으로 남성 시선에 의해서 박제된 여성의 이미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 다른 자매애(sisterhood)

이른바 일진의 장식물로서 혹은 간직하고 수호해야 하며 아니면 되돌아가 위로받고 새로운 에너지를 보충해야 하는 자연으로서의 여성 이미지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당당히 인정하고 선언하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여성 이미지가 드러난다. 설사 이 소녀들이 1960~1970년대 교복을 입고 있다고 할지라도 동시대적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여성들의 자기선언을 함축한다.

써니킴의 작업은 대부분 수학여행이나 졸업앨범 등을 위해 찍어놓은 사진의 한 장면 혹은 인생의 한 장면을 회화적 공간으로 변형시켜 놓는다. 즉 사진의 어머니나 언니뻘 되는 여성의 사진첩에서 청춘의 기록물을 수집하고 그것을 재분류하고 재배치함으로서 다른 의미 구조를 생산해낸다. <화려한 날(Colorful Day)>(2002)은 경복궁으로 봄 소풍을 나간 소녀들의 기념사진을 회화적 공간에 재배치한다. 소풍은 소녀들에게 흥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며 소녀들은 이날의 흥분과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자신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을 이상적으로 만들어 내고자 한다. 아무리 현실이 궁핍하고 피폐할지라도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을 청춘의 한장을 위해서 이상적 포즈의 한 형식을 고안해 내고 자신이 그렇게 재현되기를 스스로 기대한다. 아니면 이것은 사진기사가 강요한 포즈의 한 형식일 수도 있다. 사회가 여학생들에게 부여하는 여학생다운 발랄함과 조신함이 개량됨으로써 으레 여학생들의 기념촬영하면 떠오르는 클리셰적인 포즈의 한 형식을 소녀들은 재연하게 된다.

외부 조건에 의해서든 내부의 무의식에 의해서든 이렇게 이상화한 외연의 흔적들은 소녀들의 본질과 현실이 배제된 허위적 육체의 한 형식이 된다. 소녀들은 특별한 날에 어울릴 만한 특별한 대상으로 자신을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삭제하고 그 특별한 날의 대상으로 완벽히 이미지화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완벽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완벽한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을 써니킴은 회화적 공간에서 다시금 호명한다. 그는 기념사진이 갖는 허위적 육체의 본질을 향수라는 이름으로 호명하기보다 오히려 그 맥락이 내포하는 여성성의 상황, 즉 자매애의 문제를 들추어내고자 한다. 따라서 소녀들의 몸동작은 허위적 육체라는 단선적 시선으로 재단할 수 없으며 다른 맥락들을 들추어내야 하는 레이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2002)은 이러한 자매애의 한 면을 보여준다. 낙엽 진 늦가을 어느 숲 속에서 살포시 어깨와 허리를 서로 감싼 소녀들의 모습은 남성적 시선이 포르노에서 재현하는 레즈비언적 에로티시즘을 함축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꿈과 환상이 실현될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한 꿈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서로 북돋우며 견뎌 나가자는 소녀들의 다짐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이러한 자매애는 <야호 소녀들(Yaho Girls)>(2002)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써니킴의 자매애는 남성에 의한 성적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서 성적 대상을 여성 스스로 구축하자는 급진적 레스비언 페미니즘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기억과 체험을 공유함으로써 남성화된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남성적으로 구조화된 세계에서 상황을 문제화하려는 그들의 연대를 함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자신들의 가장 순수한 시절의 기억을 들추어내는 것은 자매애가 표상된 첫 순간을 기억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혹은 그러한 의미의 차원이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본인도 확신이 서질 않는다. 다만 써니킴이 보여주는 여성적 연대에 대한 재현의 정치학은 그것이 매우 소극적인 방식일지라도 그 맥락을 공적인 차원으로 보여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러한 재현 방식이나 감수성을 아시아적 혹은 한국적 자매애의 표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미지들은 남성화한 제도와 이데올로기 장치들에 대해서 쉽게 함구하며 개인의 기억을 남성적으로 구조화한 미적 세계관에 봉합시켜 그대로 보수적 세계관에 포섭하거나 소비할 가능성도 다분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써니킴의 작업은 그의 초기 작업인 <정원(Garden)>(1998)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이 작업은 파란색 비단 배경 위에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를 입은 소녀가 모란꽃 가지 위에서 노래하는 종달새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이는 작업이다. 이러한 경향은 십장생 문양을 수놓고 그 내부 공간에서 미지의 이상향을 향해 부푼 가슴을 활짝 펴고 어떤 미래를 꿈꾸는 <뜨락(Courtyard)>(2001)을 거쳐 최근 선보인 <행복의 충만함(Cloud Nine)>(2004)에 이르고 있다. <행복의 충만함>은 작업이 설치된 공간 내부를 행복이 충만한 이상적 공간으로 변형시킴으로써 회화적 공간을 현실 공간으로 확대한다.

자수적 공간이 함축하는 여성적 이상향

이러한 회귀는 어쩌면 소녀들의 정체성 문제를 지나 자매애 차원을 경유해서 자신들이 상상하고 일구어낼 이상향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귀결인 듯하다. 독립된 주체로 자기 정체성을 선언하고 그 정체성을 가꾸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이 연대하며 그 연대를 통해서 그들이 도달할 이상향으로 이동하는 것은 매우 논리적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써니킴과 소녀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흥미롭게도 써니킴이 발견한 것은 이상향은 양반가 규수들에게 강요되던 자수에 의해서 직조되는 이상향이다. 여성적 육체노동, 특히 부르주아 여성들에게 강요된 대표적 노동 형태인 자수와 도교적 이상향인 십장생도가 조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남성적 세계관을 여성적 노동력으로 재생산함으로써 그 의미를 탈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수로 직조하는 이상향은 남성적 세계관으로 표상되는 이상향을 재생산하기보다는 오히려 엘리스 워커 (Alice Walker)가 강조하고 탐색하는 ‘어머니의 정원’ 을 떠올리게 한다. 워커의 ‘어머니의 정원’은 백인 여성 중심의 여성주의와 자매애를 극복하며 더욱이 여성성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와 단선적인 찬양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를 치유하려는 생성적 의미의 공간이며 대안적 공간인 것이다. 써니킴은 이러한 차원을 자수적 이상향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향으로 회귀한 것은 어딘지 모르게 모든 상황을 급속히 우회하는 시도처럼 읽힌다. 즉 미시적 갈등 구조에 대한 전면적 대응 없이 곧바로 이상향에 안착하고 그것을 표상함으로써 보수적 세계관 혹은 부르주아적 세계관에서 안위를 찾는 모습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남성적 구조의 미적 세계관이 지향하는 지점과 그 세계관이 작동하는 제도적 이데올로기 장치 내부로 무력하게 포섭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는 여성주위가 하나의 정치적 기획으로써 상황을 문제화하며 그 과정에 대안을 만들어간다는 의미의 연장선에서 나온 우려이다. 또한 이러한 우려는 여성적 이상향 일반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써니킴이 직조(하고자)하는 의미와 맥락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재현의 정치학을 작동시키며 그로써 어떤 의미구조를 생산해내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자수적 세계관이 이상향으로써 작동될 가능성에 동의하면서도 이러한 성급한 이상향으로의 회귀가 동시대적 상황에 대한 문제화를 무디게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그로써 보수적 세계관 내부에서 소비되는 또 다른 하나의 타자로 그의 작업이 위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인 것이다.

써니킴의 작업은 사적 기억을 역사화하는 작업으로 요약될 수 있다. 기록되지 않는 개인의 역사를 구술함으로써 공적 역사를 분열시키고 은폐된 서사를 회복하는 새로운 역사 쓰기와 같이 써니킴은 의미화하지 않은 개인적 시각형식을 들추어내고 그 이미지를 통해 재현의 문제에 개입하고자 한다. 즉 공적 기록매체가 아닌 사적 기록매체로서 사진이 갖는 의미요소들을 회화 공간에 다시 배치함으로써 우리에게 과거에 대한 기억과 역사 차원을 재편성하며 현재와 미래의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하지만 써니킴의 작업은 그가 작동시키는 여성성의 재현이 어떤 맥락에서 위치하는지에 대해 불분명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언뜻 그의 작업 맥락들은 명쾌해 보여도 그것을 유지하고 작동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정치적 지향점은 모호해 보인다. 따라서 한국식 근대화의 경험이 이민 1.5세대인 그에게 어떤 의미 구조로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물어봐야 할 것이다.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성공한 이민 1.5세대로서 자신의 경험과 상상 차원으로 존재하던 한국에 대한 기억이 한국이라는 실제 공간에서 내부자이면서 외부자인 자신의 위치와 함께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즉 안과 사이 (in-between)에 위치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금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그의 재현 정치학은 더욱 명시적으로 의미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소녀들은 자신의 입을 열어 새로운 이야기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장언
월간미술, March 2005 pp. 99-103
Sunny Kim’s paintings move from sublime to unfeeling in an instant. In her world, human frailty flickers within the four corners of enormous historical realities. Realities where uniforms (military, academic, professional) are the vehicle, source, and subject of meaning. Nonetheless, this unrelenting uniform world is also hyperbolic, fantastic, even ironic. The sparse spaces of Kim’s depictions become a waiting veneer susceptible to the unique projections of its inhabitants.

Apparent throughout the work is the clarity in with which she renders her subjects. Their formality recalls official documentation or propaganda posters. The images seem aged: muted, black and white, passed into record. The events and people have become the raw material of institutional histories. We recognize the pictorial devices at work immediately and are inclined to make assumptions. Under A Tree is obviously derived from some sort of academic record, perhaps a class photo, while the Girl in Uniform series appear to have been cropped from a larger image. Her group photos speak of the manipulations and ultimate meaning of institutionalized representation. The paintings of individuals emphasize estrangement, separation from the whole, and brooding. In Kim’s work there is a dynamic between the individual and group which spans from playful to painful. It is difficult to look at Late Afternoon and not feel irony. On how many levels are these young women being molded? Even while participating in the construction of this naturalistic image, they are stiff and immaculate. Are they fully conscious beings or some sort of beach side prop?

Central to Kim’s exploration are several questions about consciousness. In the most general sense, Kim asks where individual consciousness begins. After looking at Late Afternoon for a moment longer, the subjects gradually appear less regimented. There is a simple poetry in the band of dark mountains. The beach itself is a pattern of light and dark that says more about painterly decisions than about the mechanical translation of photographic space. Kim, as a painter, inserts an interpretive realm before the photograph. Her concerns do not end with photo realistic technique; rather, they begin there. Consider the not-quite-black-and-white palette of Blue Palace, or the unnatural tonal shift between foreground and background in Pond. Kim’s manipulations are in dialogue with the conventions of the photographic material from upon which she draws. With this in mind, her works veer from oppressive to dream-like. In this world of mechanical clarity we find fantasy on all the fringes. The impassive and calculated expressions of the young women hint to at a deep physiological life.

A uniform is, by definition, something which is always the same. By remaining consistent a uniform affirms the jurisdiction of an institution over an individual. Like the ideology it manifests, the uniform is a Truth which should not be subject to worldly events (such as a fashion show or a sloppy lunch, for example). By repurposing institutionalized dress with aesthetic and psychological embellishments Kim erodes a bit of their power. On the other hand, it is a mistake to think that her work seeks to overturn such conventions. In addition to transforming the uniform, Kim relies on its symbolic power. In all her paintings, the uniform introduces an element of timelessness. Displaced yet still intact, the uniform’s stability serves an allegorical function. We are familiar with how an aged black and white photo may trigger a memory from this device’s frequent use in TV and movies. Kim expands this device with the authority of the uniform. Not only does her uniform invade our photographic-like memories with institutional pollution, but it is reverie itself: persistent, ethereal, unreal. In the end, like our memories, the uniform is not reality. It is merely worn.

This brings us to one of Kim’s darkest questions. Kim is not simply saying that we fill our roles, our very identities, the same as we fill a uniform. She is asking “who is wearing who?” Are we a product of what these uniforms represent, do they determine us? Are they just a surface? Of course, her answer lies somewhere in between. This ambivalence can lead to a playful game of “hide and seek” with individual consciousness or allow possibilities for the worst forms of oppression.

In Garden and Underworld Kim introduces a new element into the work. The photographic space has ruptured significantly. Uniformed figures now stand before painterly emulations of 18th century Korean embroidery. The background, unlike the other paintings, is not a backdrop. The embroidery functions as an emotional projection which seeps into the foreground to interact and envelope the figure. Clearly, Kim is not only analyzing consciousness in the public sphere, but in the domestic as well. There is a juxtaposition of two worlds. The first world describes how the individual fits into a larger social universe, within clearly dominant institutions. The second world is traditional and feminine. The starched white collars and plain black skirts contrast so dramatically with the pattern that the image suggests surrealism. This pretty and magical space creeping about the figures might be the thoughts of the distant girls documented in the other paintings. Garden and Underworld are candid, even archetypal. The figure is, perhaps, a powerful visionary.

Kim’s retreat to this interior space reveals not only how the influence of tradition sneaks into newer roles and institutions, but how our feelings are not always our own. The very fabric of femininity is an internalized fiction; an elaborately woven construct. When surfacing in a uniform bureaucratic state, this fabric seems like an escape. When considering the historical restrictions placed on women in traditional societies, however, this colorful freedom is only seeming. Even if these young women are allowed a fantastic world, what good is it if they are contained by it — if it is tied to a servile and meticulous domestic role? Still, Kim manages to load the paintings with ambivalence. The weirdness of her juxtapositions are larger than the sum of their parts. When these two world views come together it is almost as if she is suggesting a utopian solution in earnest. In comparing the restraints of traditional and modern Korean cultures she manages to highlight what each is lacking. In this process she synthesizes hope and anxiety.

Finally, the autobiographical dimension should not be overlooked. Kim was a uniformed school girl herself. She explains, “I am haunted by that aspect of my past – I cannot shirk the feeling that a significant element of my life has been lost. Having left Korea in my teens while still having strong ties, I often wonder how my life might have been different had I stayed.” There is much in Kim’s world to hinder the development of the individual, yet it remains a birthplace of consciousness. These works are not tragic. They are wonderings of these girls’ futures; of whether or not their glimmer of self realization will be snuffed out.

Paul Johnson
New York, 2001
써니 킴의 회화는 숭고함에서 비감정적 상황으로의 순간적 이행이 진행된다. 그녀의 회화세계에서 보여 지는 인간의 나약성은 거대한 역사적 실제의 영역에서 진동하며 현실의 실제성을 가지는 유니폼(군대, 아카데미, 프로페셔널)은 의미의 장치이자 근거이며 주제가 된다. 이러한 유니폼의 세계는 과장적이거나, 환상적이기도 하며 심지어 모순적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희미한 공간은 그 공간에 존재하는 대상이 지닌 요소들의 독특한 투영에 부속되는 표면으로 역할 한다.

작품 전반에 걸쳐 그녀는 지속적이고 명료한 의미전달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 표출되는 주제의 형식성은 공공기관의 기록이나 선전 포스터를 연상시키며 그 이미지들은 빛바랜 흑백의 기록처럼 오래된 듯이 보인다. 사건이나 사람들은 역사에 기록된 공공 기관에 남아있는 원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회화적 장치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하며 또한 어떤 가정도 하게 된다. <Under a Tree>는 어떤 종류의 학생생활 기록부처럼 보이거나 앨범사진 같은 반면 <Girl in Uniform> 시리즈는 커다란 이미지에서 어떤 부분만 오려낸 것처럼 보인다. 여러 명이 같이 찍은 사진은 제도에 길들여진 작위적인 것에 관한 재현이자 명백한 의미에 관해 말해주는 반면 개인을 그린 회화작품들은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소외감을 강조한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즐거움에서 고통까지를 포괄하는 개인과 그룹간의 역동성이 존재한다. <Late Afternoon>을 보는 순간 아이러니를 느끼게 되는데 이 젊은 여성들은 얼마나 다양한 차원에서 그녀 작품의 모델이 되고 있는가? 여성들은 자연주의적 이미지 구성에 참여하지만 그들은 순박해 보이거나 경직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의식을 지닌 존재들일가 아니면 분위기를 띄우는 오브제 일가?

써니 킴은 의식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탐구하며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개인의 의식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Late Afternoon>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림의 주제가 통제에서 점점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두운 배경의 산은 단순한 시적 존재이며 해변은 기계적인 해석의 사진적인 공간이 아닌 빛과 어둠의 패턴으로서의 회화적인 결정에 관한 것이다. 화가로서의 써니 킴은 사진자체가 아닌 사진의 해석적인 영역을 도입한다. 극사실적인 기술은 작업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 작업의 시작이라 볼수 있다. 정확히 흑백이라고 보기 어려운 색채를 가진<Blue Palace>와 배경과 전경간의 자연스럽지 않은 톤의 변화를 가진<Pond>를 생각해 보자. 그녀의 회화적 능력은 그녀가 그리고 있는 것과 전형적인 사진이 갖는 재료의 물성에 대응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찾을수 있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그녀의 작업은 억압의 세계에서 꿈과 같은 세계로의 선회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계적인 명증성의 경계에 존재하는 환영을 발견하게 되며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젊은 여성들의 인상적이며 명확히 계산된 표현에서 그들의 병리적인 삶을 예시하고 있음을 안다.

유니폼은 항상 똑같은 어떠한 것으로 정의된다. 유니폼의 언제나 똑같은 그 속성 때문에 공적인 기관이 개인에게 행하는 지배를 정당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유니폼은 패션쇼나 일상적인 점심식사와 같은 세속적인 사건들과는 관련이 없어야 하는 진실인 것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미학적 심리적인 윤색을 거쳐 재구성함으로써 원래의 제복이 가지는 의미를 훼손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이 관습을 전복하기 위한 방법의 모색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니폼의 변형과 함께 그 옷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유니폼은 시간을 초월한 그 무엇을 만들어 내는 장치가 되며 이렇듯 의미 변환에도 불구하고 유니폼이 가지는 안정성은 알레고리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TV나 영화를 보면 오래된 흑백사진이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됨으로써 우리의 기억을 촉발시키는지 잘 알고 있다. 작가는 유니폼의 권위가 가진 장치를 가지고 확대시킨다. 그녀의 유니폼은 제도의 세례를 받은 사진화 된 우리의 기억을 공략하지만 그 자체는 또한 미묘하고 지속적이어서 실제하지 않은 몽상과도 같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기억처럼 유니폼 자체는 현실적 실체가 아닌 단지 몸에 걸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는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녀는 유니폼을 입음으로써 발생하는 정체성의 충족을 말하거나 혹은 각자의 단순한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질문은 “누가 누구를 입고 있는가?” 이다. 유니폼이 우리를 결정짓거나 혹은 대변의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유니폼은 단지 표피에 불과한 것인가를 묻는다. 물론 그녀의 대답은 이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한다. 이러한 애매성은 개인의식에서 ‘찾고 감추기’의 게임이 되거나 억압이라는 우려스러운 가능성을 허용할 수도 있다.

<Garden>과 <Underworld>에서 작가의 작업에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는데 우선 사진적 공간의 의미가 파괴되어 유니폼을 입은 인물들은 18세기 한국 자수의 회화적 배경 앞에 서있다. 다른 작품과는 달리 여기서의 배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자수는 인물을 감싸거나 영향을 미치며 배경에 흡수되는 감정을 투사하는 역할을 한다. 그녀는 분명히 의식의 공공적 영역과 함께 의식의 가족적 분석을 하고 있다. 두 세계는 서로 병치된 다. 첫번째 세계는 개인이 명백하게 지배적인 제도의 거대한 사회 구조에서 어떻게 적응 하는가를 기술하며 두번째 세계는 전통과 여성성의 세계이다. 풀을 먹인 하얀 칼라와 소박한 검정색 스커트는 초현실주의를 암시하는 이미지의 패턴과 극적인 대비가 이루어진다. 인물에 스며드는 아름답고 마술적인 공간은 다른 그림에서 이미 등장한 소녀들의 상상일지도 모른다. <Garden>과 <Underworld>는 솔직한 하나의 전형처럼 보이며 그림 속의 인물들은 강렬한 환영일 수도 있다.

작가의 이러한 내적 영역으로의 후퇴는 전통이 어떠한 방법으로 새로운 임무와 제도에 영향을 미치는가와 함께 우리의 감정조차 늘 자신의 것은 아님을 밝혀 준다. 여성성의 잘 짜여진 구조는 하나의 내재화된 허구라 볼 수 있다. 유니폼이 관료주의적 상태를 표면화시키는 반면 여성성의 구조는 하나의 탈출구처럼 보인다. 전통적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과된 역사적 제한들을 생각해 볼 때 이런 다채로운 자유는 오직 표피로만 인식된다. 비록 젊은 여성들에게 환영적인 세계가 허용된다고 해도 그들이 그 환영의 세계에 갇혀있거나 그런 환상이 피지배적이고 사소한 가정적인 역할로 연결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가? 여전히 작가는 그림에 애매모호함을 도입한다. 그녀가 만드는 병치의 미묘함은 각 부분이 만든 합보다도 큰 역량을 발휘한다. 두 세계가 하나로 될 때 그것은 마치 그녀가 찾고자 하는 유토피안적 해결로 보인다. 한국의 근대문화와 전통문화의 속박을 비교함으로써 그녀는 각 문화에서의 결핍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희망과 불안을 체계화 한다.

한편으로 작가의 자전적인 차원도 간과 될수 없을 것이다. 그녀 자신도 유니폼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내 삶의 의미 있는 요소를 상실했다는 느낌을 떨치기는 어려웠다. 한국과 강한 유대가 생기기 시작한 십대에 한국을 떠났지만, 아직도 가끔 나는, 만약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를 상상하곤 한다.” 써니 킴의 세계에서 그러한 요인들은 그녀를 부자연스럽게 하는 부분이지만, 여전히 그 장소는 의식의 고향이 되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결코 비극적이지 않다. 그녀의 작품은 등장하는 소녀들의 미래에 대한 경탄과 함께 자기실현의 희망과 소멸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다.

Paul Johnson 폴 존슨
New York, 2001